전쟁의 페허에서 얼마되지 않던 시절 1960년대 한국은 무척이나 가난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외화획득을 위해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들이 떠났고 월남파병 군인들이 있었고 그리고 또한 간과 해서는 안될 남태평양의 사모아 원양어선 선원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9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남태평양 한가운데 아메리카 사모아에는 한국이름이 새겨진 백여명의 묘비가 있으며 살아 남은 자들이 술과 꽃을 바치며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사모아는 원양어업의 메카였고 참치산업의 전진기지였으며 노다지 땅이었다. 한국을 떠나 원양어선에 오른 젊은이들은 한번 배를 타면 3년만에 육지로 돌아왔고 그바다는 희망의 바다였고 눈물의 바다였다.
부산항에서 떠난 원양의 꿈은 거의 모두가 가난의 탈출이었고 좋은 환경이나 교육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배를 탔다고 고백하였다. 남태평양에 청춘을 바친 그 시대의 산업전사들은 배가 침몰하거나 좌초되면서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졌고 1달러는 무서운 돈이었고 큰돈이었다. 그 달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그렇게 번 무서운 돈을 한국의 가족에게 몽땅 보냈으며 그 돈으로 부모님 봉양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켰다.
선원들의 피눈물 나는 고생과 희생으로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 들면서 사생결단하고 하루하루를 버티었으며 그리고 우리 선원들 정말 많이 죽었다.
바다에서 죽은 동료들을 땅에 묻지 못하였음을 통곡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위령제를 해마다 지내고 있다. 그사이 시간은 많이 흘러 사모아는 더이상 참치 노다지 땅은 아니고 그 풍성하고 여유로웠던 호시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사모아에서 참치잡이 하던 그들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다. 돌아보면 어찌 그 먼곳까지 왔을까? 뒤돌아 보니 아득한 세월 너무 오랫동안 정신없이 살고 보니 어느덧 오십 고개를 넘기고 있었고 고향에 돌아가려니 그동안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자녀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고 어떤 이는 가족하고 연락이 두절되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에 가 다시 직업전선에 뛰어들려니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고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 돌아 가지 못하고 개인사업을 하며 사모아에 정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 일들은 사모아 경제에 이바지하게 된다. 어떤 이는 사모아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서로를 독려하며 형제 같이 지내면서 장례를 치러주기도 한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 사모아를 전격 방문 하게 되고 다함께 눈물의 상봉을 하게된다. 박 대통령이 이들과 악수를 할 때 그들의 손바닥이 돌덩이처럼 굳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 그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과 노고에 많은 격려와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사실은 한국땅에서 그들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방문에 그들은 감격하고 있었다.
그때 이역만리 눈물의 바다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의 업적은 독일 광부나 간호사들보다도 훨씬 많은 외화를 한국에 보내 결론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잣돈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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