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여성 김순희씨는 지금 "언론이 무서워요"라며 사람을 피하고 있다. 김씨의 보호자인 한청일씨는 "잘못된 보도로 김씨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며 김씨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의 접촉마저 꺼리고 있다. 이번에 한인 언론들의 김씨 관련 보도를 접한 독자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많은 탈북자에 대해 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신문의 보도내용을 독자들은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언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전적으로 불신하는 것도 바보스런 일’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역설적 현실을 인식하면서 신문을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
독자들은 대체로 신문을 읽으면서 신문의 틀 속에 갇힌다. 자기가 직접 체험했거나 별도의 시간과 정보를 가지고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 한 신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 바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소박한 독자들은 신문이 매일 아침 제공하는 틀 속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갇히고 만다.
그래서 때로 독자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고 혼란을 겪는다. 더구나 사실과 다른 것이 보도될 때 사실의 당사자는 혼란 차원을 넘어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 피해는 독자들이 신문을 읽어 겪게 되는 혼란의 피해나 오류의 틀 속에 갇혀 입는 피해보다 수백 수천 배가 크다.
본보의 특종보도로 지난 한달 동안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북 여성 김순희씨 사건은 언론 보도가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독자들에겐 얼마나 많은 혼란을 주는 지를 보여준 단적인 예다.
온갖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순희씨에게 한인사회가 막 온정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할 때다. 갑자기 모 신문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가 LA의 한 주간지에 보낸 서신을 근거로 "김순희씨 사건은 미국행을 목표로 했던 조선족 여성이 꾸민 각본에 따른 해프닝"이라며 김씨를 조선족으로 단정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완전 부인했다.
이 기사는 또 북한 대표부의 "김순희라는 녀성은 우리 공민으로 등록된 바가 없다"는 서신 내용을 인용하면서 "북한 대표부의 ‘우리 공민 아님’ 확인은 김씨 사건을 완전히 정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더구나 "언론들이 사실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김씨 사건을 보도했다"며 타 언론을 비난하는 경솔함마저 서슴지 않았다.
아들과 생이별까지 하고 새 삶을 찾아 수년을 헤맨 김순희씨에겐 한마디 호소도 못하고 얻어맞은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너무도 뻔한 논리의 북한대표부 서신 한 장만으로 타 언론사의 보도까지 시시비비를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 정말 탈북자가 있다 하더라도 탈북을 인정하는 나라이든가. 황장엽씨마저 북한 출신임을 부인한 나라다. 그런 북한이 억압과 고통을 피해 나왔다는 김순희씨를 북한출신이라고 할 리 만무하다.
이 기사는 특히 "LA총영사관이 북한대표부가 공민이 아니라고 했다면 김씨가 북한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며 "총영사관측이 한국의 대북 관계 부처에 ‘김순희씨는 탈북자가 아니다"고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총영사관은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며 "총영사관은 김씨의 탈북 여부를 조사할 필요조차 없으며 ‘김씨가 탈북자가 아니다’고 보고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주 말 한국의 탈북 여성 모임인 진달래회 장인숙 회장은 김순희씨를 면담한 뒤 김씨가 북한 출신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신문은 그동안의 보도에 대한 아무런 해명 없이 이번엔 ‘김순희씨는 북한 출신’이라고 보도했다.
지나친 경쟁의 결과일 수도, 판단의 착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문은 정직해야한다.
김씨의 탈북 여부를 가리려는 한인사회의 객관적인 노력은 끝났다. 이제 망명허가는 미 당국과 김씨의 몫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지나간 일을 거론하는 것은 남의 치부(恥部)를 들춰내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나를 세우려함은 더더욱 아니다. 살아있는 과거의 반복에 불과한 미래를 같이 준비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다시 한번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때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