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고향에 가는 것은 순례에 해당한다. 그것은 정녕 순례이다. 그 곳에서 긴 세월 동안 똑같은 몸짓으로 나를 손짓하는 山川이 있다. 그 몸짓에 응답하여 유년시절을 몽땅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산아 놀자, 들판아 놀자, 냇물아 놀자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나의 식구나 다를 바 없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고 나와 그들은 그렇게 다가선 것이다.
우리는 한 덩어리의 꽃이 되어 사철을 꽃대궐 속에서 살았으니 봄 여름 가을은 물론이고 겨울은 눈꽃과 얼음 꽃 속에서 같이 지냈다.
소월 시인은 왜 가을 봄 여름 없이 피는 꽃만 찬탄하고 겨울 꽃은 빠트렸는지 은근히 투정을 하면서 말이다. 山川은 결코 외로운 자연이 아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이고 나는 그들의 사랑이 되어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고 의미가 되어 온지 오래다. 그것이 고향이다. 다른 곳에는 산과 들과 냇물이 없더란 말인가. 그러나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의미가 되어 줄 때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고 생명력이 깃들게 되는 것 아니던가.
아무리 많은 세월이 격한 뒤에도 고향산천은 눈이 닿는 그 순간에 관계가 복원되는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관계가 고향이라는 곳이다. 고향의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곳은 산마루에 올라갔을 때이다. 저멀리 아스름히 줄지어 흐르는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유구한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때문이다. 또 바로 건너편에 서로 이웃하여 있는 조상의 묘를 바라보고 있으면 돌아갈 곳을 안 듯한 편안함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묘소가 작은 국토를 잠식하고 산림을 방해하는 점을 지적하고 근거자료도 제시하면서 납골당 문화같은 것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묘지 문화를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묘소는 고향의 일부가 되어 강인한 생명력으로 후손들로 하여금 고향을 찾게하고 순례를 하게 한다는 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일이다. 부모와 조상의 묘소를 성묘하고 관리하고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큰 이유가 아닌가.
우리의 삶이 넉넉하고 너그러워지는데 이 고향 순례만큼 좋은 것도 없으리라. 특히 고향 사람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하드래도 금방 서로에게 의미로 다가서게 된다. 금방 진실을 내어 보이고 인정의 향기를 내 뿜는 것을 보면 알 일이다. 어느새 술잔이 오가고 밥 그릇이 전해지면서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걸림이 없다는 저 무애의 대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의 순정과, 순정으로 다가서는 인정은 장엄 그 자체이다. 높은 빌딩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단장한 대궐의 용마루가 어찌 장엄일 수 있으랴.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바로 名장엄인 것이니 이름을 붙이되 장엄이라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유위의 세계에는 전부 名장엄일 뿐 알고보면 우리가 할 장엄은 없는 것이다. 황금도 모자라서 그 위에 다시 보석을 놓은 왕관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칠십톤의 금을 사용했다는 이탈리아의 성당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괜한 짓들을 했다는 느낌 뿐이다.
그러나 진정을 토로하고 순정을 내 뿜는 것은 非장엄이다. 무위의 세계에는 장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위장엄은 모두 非장엄인 것이며 괜한 짓거리가 아닌 진짜 장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터전은 유위의 세계이기 때문에 正見이 부족하여 가치관에 흠결이 생기게 되면 많은 죄업을 더하게 될 뿐이다. 삶에 필요했던 돈과 자본이 名장엄으로 둔갑한 자본주의 말기 현상에 휘말리지 말아야 할 일이다. 병든 몸에 무슨 장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유위세계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이 두 세계를 잘 넘나들어 갈등이 없는 삶을 걸림이 없다는 무애의 삶이라는 것이지 무위의 세계에서 일방통행으로 나오는 힘을 무애하고 하지 않음을 알야하 한다.
잘익은 벼는 고개숙여 낮은 곳을 향하고 훈풍은 저 낮은 바다에서 시작하여 높은 산 깊은 골짜기의 꽃잎을 흔들리게 하는 그런 흔적없는 뒤섞임이 빼어난 장엄을 우리는 또 화엄이라고도 하는데 화엄의 세계는 바로 우애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꽃으로 장엄한 세상말이다. 너는 나를 거절하고 나는 너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의 삶은 동물나라의 생존일 뿐 食色말고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고향은 무위와 무상과 무애와 장엄과 순정과 인정과 화엄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곳이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을 나는 고향순례라고 부른다.
김춘수 시인이 노래한 꽃을 띄어 보내고 싶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오고 나는 그에게로 가서 서로의 꽃이 되었다/ 나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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