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관리-기자 비밀접촉 힘들어
백악관과 갈등-승진 좌절 추측 속
배신자냐 영웅이냐 평가 엇갈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내부 고발자가 마크 펠트 전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으로 확인되면서 ‘딥 스롯’의 수수께끼가 30년만에 풀렸으나 많은 의문점들이 새로이 제기되고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돼 수사 당국에 공개적으로 밀고한 닉슨 대통령의 전 법률고문 존 딘 은 FBI 일일 업무를 총괄한 고위관리가 기자들과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고 한밤중에 지하 주차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며 다른 FBI 요원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음모설을 제의했다.
펠트는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와 모두 7차례 만났는데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우드워드 기자는 딥 스롯을 만나고 싶을 때마다 빨간 깃발이 있는 꽃화분을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 뒤편으로 옮겨놓았고 딥 스롯은 우드워드 기자의 아파트에 배달되는 뉴욕타임스에 시계를 그려 넣는 ‘신호’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펠트가 내부 고발자의 길을 선택한 동기가 관심의 핵심이다.
고위 행정부 관리로서 내부 고발자가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펠트는 1980년 정보수집을 위한 불법 침입을 승인한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가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사면된 바 있을 정도로 FBI에 헌신적이었다. 더구나 이처럼 연방법과 FBI 기준을 위반하고 정부 비밀을 제보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더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고민하고 변호사와 상의한 끝에 변호사를 통해 월간지 배너티 페어 기사에서 30년간 지켜오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워싱턴포스트는 1일자 기사에서 펠트가 FBI 수사에 대한 백악관의 간섭에 대해 격분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펠트는 1972년 5월 제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이 숨졌을 때 닉슨 대통령이 FBI를 굴복시킬 결심이었다고 1979년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또 펠트의 결정에 개인적인 이유도 기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펠트는 후버 FBI 국장이 숨졌을 때 부국장으로서 후임 서열에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그러나 외부 인사를 불러들여 패트릭 그레이 법무차관을 FBI 국장대리로 임명했다. 펠트는 그레이가 워터게이트 수사내용을 백악관에 보고, FBI의 수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펠트의 가족은 그가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FBI 관리로서 자신의 행동이 적합했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펠트가 지난 30년간 재차 자신이 딥 스롯이 아니라는 주장을 관철해 오다가 이를 시인한 것도 마침내 자기가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계에서도 그가 대통령과 정부의 신임을 저버린 배신자인지 아니면 은폐 위험에서 진실을 파헤친 영웅인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펠트의 지지자들은 그가 침묵을 지켰다면 닉슨 대통령이 권력남용 시도에서 성공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결국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가져왔으며 법무장관, 백악관 내무 보좌관, 대통령 법률고문, 선거자금위원장 등 약 40명의 행정부 관리들이 중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 판정을 받게 됐다.
<우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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