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돌보는 간병인의 파산을 막아줄 정책적 차원의 지원이 시급한 실정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병수발의 끔찍함을 꿰뚫은 ‘촌철살인’의 표현이다. 조금 과장된 게 아니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혈육의 정이 얕아서가 아니라 장기 간병이 초래하는 내상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아온 메릴랜드주의 한 40대 여성은 “간병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돼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5년 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병수발 2년 만에 일자리를 잃었고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미국인 6,500만 가족 병수발에 생활 묶여
직장해고·우울증에 본인 건강까지 해쳐
가족 중 누군가 만성질환으로 몸져누울 경우 형편이 넉넉하다면 전문 간병인을 고용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서민들의 경우엔 싫건 좋건 직접 병간호를 해야 한다.
이처럼 집에서 만성 질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 지체부자유자를 수발하는 미국인의 수는 무려 6,500만명으로 이들이 제공하는 무료 봉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3,750억달러에 달한다. 정부가 재택 간호(home care)와 양호원 서비스에 지불하는 비용을 합한 1,580억달러의 두 배가 넘는 액수다.
가족 간병인들의 75%는 가계를 꾸려가야 하는 근로자들로 장기적인 병수발을 감당할 만한 재정적 능력이 없다. 이들이 밟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간병기간이 장기화되면 우선 아등바등 모아두었던 비상금이 증발하고 이어 애써 장만한 집이 날아간다. 가정과 직장으로 신경이 분산되다 보니 업무 집중도가 떨어져 고용주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해고의 도끼날에 언제 목이 잘려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장마철의 강물처럼 수위를 높여간다. 몸과 마음, 일과 가정이 황폐화 되는 건 시간문제다.
지난 2009년 에버케어와 미국 케어기빙연합회(NAC)가 실시한 서베이에서 근로 간병인들의 47%는 병수발 비용을 감당하느라 저축해둔 돈을 모두, 혹은 거의 소진했다고 밝혔다. 또한 가족 간병을 담당하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는 비율이 2.5배나 높고 소셜시큐리티 생계보조비(SSI) 수령 비율은 5배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 무료 간병인들이 스트레스로 인해 받는 육체적 고통이다. 가족 구성원을 장기 간병하는 이들 ‘그림자 영웅’들은 본인 스스로를 위해 의사를 찾아가는 경우가 드물다. 운동을 할 시간도 없고 식생활도 엉망이다.
미국은퇴자협회(AARP)와 NAC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고령 환자를 돌보는 가족 간병인의 거의 25%는 스스로의 건강상태를 “보통”이거나 “나쁘다”고 답했다. 또한 40~70%는 병증에 해당하는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까지의 연구결과 병수발에 따른 스트레스는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확인됐다.
온갖 종류의 물적, 인적 자원을 부족함 없이 지닌 유명 인사들조차 가족의 간병이 수반하는 충격과 슬픔에 맥없이 무너지곤 하다. 유명 여배우인 캐서린 제타-존스가 그 좋은 예다. 그녀는 식도암 말기인 남편 마이클 더글라스의 처절한 투병생활을 지켜보다 그만 우울증에 걸렸다. 밤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낮에는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한동안 산송장으로 지내던 그녀는 지난 3월 조울증 판정을 받고 정신요양원에 입원했다.
장기 병수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간호해야 할 대상이 치매환자면 간병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진다. 치매환자 간병인은 병수발이 끝난 뒤 최고 3년이 지나도록 약화된 면역체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국립과학원의 연구결과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사정이 이 정도면 근로자 간병인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파산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줄 제도적인 장치가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변변히 눈에 잡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노부모 병수발을 왜 정부가 지원해야 하느냐는 ‘철없는’ 소리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을 외면할 경우 고용주와 사회 전체에 더 큰 부담이 돌아간다. 우선 고령자를 돌보는 근로자의 의료경비가 같은 직장 내 다른 직원에 비해 평균 8%가량 늘어난다. 고용주들이 지불해야 하는 직장 의료경비가 매년 1,340억달러씩 추가된다는 얘기다.
간병인들의 생산성 둔화에 따른 손실도 만만치가 않다. 지난달 열린 미국노년학회(Aging in America) 연례 모임에는 노인문제 전문가 3,700여명이 참석, 거의 1주일 간 당면 현안을 논의하고 의견을 교환했지만 고령 환자 간병인 지원에 관한 희망적인 전망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보건부의 노화문제 담당 차관보인 케이시 그린리는 기조연설에서 그녀가 시행해야 하는 ‘클래스법’(CLASS Act)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년 전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을 얻은 클래스법은 연방 정부가 직장을 통해 미국의 근로자들에게 제공하는 장기 건강보험 플랜으로 관심을 모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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