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웃지 못할 징크스가 하나 있다. 내가 관전하는 운동경기에서 우리 편이 이기는 법이 없다. 심각한 경기일수록 더욱 그런 일들이 생기곤 한다. 지난 8월 10일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한국과 일본이 동메달을 놓고 격돌하는 역사적인 경기가 있었다. 그날 TV로 생방송을 한다고 신문에 보도 되었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경기만은 직접 우리 젊은이들이 일본 선수들을 누르고 승리의 사자후를 포효하는 흐뭇한 장면을 보고 싶었었다. 며칠 전에 새로 구입한 42인치 고화질 TV가 더욱 밝은 화면을 나에게 선사할 것이고 나의 집 거실 또한 스릴에 찬 순간들을 흥분케 하기 부족함이 없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고 있었다.
나는 유소년기를 일본의 강압 정치 하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세대다. 고노 죠센지메(한국사람들을 폄하하는 총칭) 라며 습관적으로 한국인 전체를 멸시하던 말들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고 철들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공부는 뒷전이고 그들의 침략 전쟁에 동원되어 비행장 닦기, 휘발유 대용의 송진 채취 등으로 끌려 다녔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연배 소녀들은 일선 장병들의 성노예로 끌려 나가는 눈물겨운 일들도 경험했다. 그런 쓰라린 상처를 주었던 침략자들의 후손들과 대한의 아들들이 원수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것처럼 만난 것이다. 시합 시작 때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어 한인식품점 구내식당에 들렀다. 식사를 마친 중년 부인 몇몇이 식탁에 둘러 앉아 한담을 하고 있는 사이 C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친분 있는 권사님이기에 어찌 이 시각에 남편은 어디 두고 하며 말을 꺼내니 “남편들은 축구구경 한다고 집에 계시고요 , 내가 구경하면 언제나 우리 팀이 지기 때문에 이렇게 친구들과 바깥에서 빙빙 돌고 있지요.” 씁쓸한 대답이었다.
간단히 점심을 마친 나는 밖에 나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집이 아니라 버크 레이크 공원을 향해 차머리를 돌렸다. 녹음 우거진 공원 안은 찌르라미 우는 소리만이 오후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 호수를 끼고 도는 산책로에는 보행자의 인적이 드물었다. “경기 결과만 알면 되지” 혼자말로 중얼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에게는 꼭 상대방이 져야하고, 망해야하고, 그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하는 그런 샤덴 후로이데(Schadenfreude)는 나의 믿음에 역행하는 일이요, 나의 윤리관에도 타협할 수 없는 일, 그저 결과만 알면 되지 하고 그럴싸한 결론을 내리고 그 날 하루 일과를 끝냈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친구 K에게 탈장수술 결과 문안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순조로 왔고 축구가 이겼다는 소식도 들었다. “뭐! 일본을 눌렀어? 몇 대 몇이지?”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목마저 메어가니 친구에게 “또 연락할께” 하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실로 통쾌한 감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전열을 다듬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며 한국축구를 세계정상에 올려놓는 과업이 남아있다. 잔이 넘치는 축배를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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