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음이 짙게 풍기는 4월의 토요일 저녁, 시가 있고 수필이 있는 그리고 음악이 함께 흐르는 열린 낭송의 밤. 워싱턴 문인회에서 그 첫 장을 마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부터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려 왔다.
고국에서 설익은 문인들이 함께 모여 시와 수필을 발표하면서 신랄하게 평론도 하고,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한 회원의 병원 예배실에서 음악회 겸 문학의 밤을 일년에 두서너 차례 가졌던 그 추억이 그립던 차에 워싱턴 문인회에서 열린 낭송의 밤을 마련한다니 문학에 녹슨 이 나이에도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그윽하면서도 청아한 피아노 음률이 조용히 흘러 나왔다. 최영권 신부의 피아노 연주로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첫번째 등장한 김행자 씨의 낭낭 하면서도 은은한 자작시 낭송이 시작됐다.
/ 숲에 가면 / 마지막 연에서 사는 것이 / 울적해 지면 / 숲으로 이사가고 싶네 / 숲에 가서 / 길을 잃고 싶네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까? 시인은 자연이 숨쉬는 순수한 그 숲속에서 살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시인의 얼마나 순수한 마음의 표현인가. 때로는 아름다운 숲속에서 새들처럼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지 않았던가.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꿈 같은 생각은 시인 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어지는 ‘병산서원’ 강혜옥씨의 자작시 낭송.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념하려고 안동에 세워진 서원 고색창연함에 함부로 흐트러질 수 없는 몸가짐, 누각에 앉아 옷깃을 여미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젊다는 것, 나이 들면 절실하게 느껴질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배숙 씨, 젊음 속에 이지적인 것이 깃들어 있는 듯.
봄 / 사방으로 쏘아대는 몸살에 / 연분홍 빗살을 열고야 마는 / 아름다운 가슴앓이 /
오는 봄을 지적으로 노래할 때 그 봄은 더 격조있는 봄이구나 하고 느껴본다.
세 편의 시낭송에 이어 ‘버지니아 하늘’ 양상수 씨의 수필 낭독 순서다.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내가 사는 하늘이 넓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 왔는데 한국에서 온 조카아이가 “버지니아 하늘은 참 넓네요”라는 한마디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넓은 하늘을 다시 확인 하던 일. 빌딩 숲 속에서 네모난 하늘만 쳐다보던 조카 아이를 통해 새삼 버지니아의 하늘이 넓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바라다 본 하늘, 또 다른 깊이와 느낌을 주는 수필이라는 장르 속에 숨어 있는 매력을 느낀다.
계속해서 피아노 연주는 더 서정적으로 조용히 흐르고 사회자의 낭랑한 목소리와 재치 있게 진행해 나가는 순서 속에 시인 몇 분의 낭송과 수필 등이 분위기를 더해 갔다.
그리고 소프라노 진정숙 씨의 ‘아름다운 얼굴(도나우디 곡)’과 ‘망향’(최영섭 곡)이 곱게 곱게 젖어 들었다. 시가 있고 수필이 있는 곳에 음악은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나린아 씨의 “봄이야” 중 선뜻 머리에 남는 시 한 구절,
아- 나도 풀이파리처럼 / 파랗게 바람나고 싶다 / 단정하게 시치미 떼던 리본이 / 되어 풀풀이 풀리고 싶다.
최영권 신부의 슈베르트 피아노 연주는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이 저녁을 넉넉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이 열린 낭만(낭송)의 밤에 어디론가 가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다. 붉은 꽃 이파리처럼 빨갛게 바람나고 싶다. 이 봄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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