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는 중공군에 적.아군 구분없이...”
"매년 이 맘 때면 전우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저만 이렇게 혼자 살아서… 산 사람들이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게 전쟁의 아픔이죠."
6.25전쟁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 국군과 북한군이 뺏고 뺏기는 전투를 가장 치열하게 벌여, 일명 ‘펀치볼 지구’로 불렸던 강원도 양구 전투지. 정승조(84) 옹은 1952년 육군 보병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해 있을 무렵이었어요. 38도선 근처에서 북한군과 대치해 있다가 고지를 하나 내주면 하나 따오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서로 땅따먹기 하던 시기였지요…"
정 옹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시절을 황해도 해주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 공산당 정권이 북한에 수립되자 온 가족이 남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6.25 발발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정 옹은 1951년 1.4 후퇴 후 정식으로 군복을 입은 뒤 순천 예비사단에 배치돼 지리산 공비토벌에 나섰으나 1년 뒤인 1952년 3월 수도사단으로 편입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등으로 불리며 한국전쟁 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강원도 양구전투지로 가게 된다.
"그 날은 정확히 1952년 5월12월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이었는지 ‘고지전’이 활발하던 때였습니다. 참호를 파고 적들을 기다리는데… 멀리서 꽹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중공군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더군요. 그날 전투는 정말 말 그대로 아비규환 이었습니다. 적, 아군을 구분을 할 수가 없더군요.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정 옹은 이날 전투에서 몇 걸음 앞에 떨어진 박격포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진 뒤 순간 살아야 갰다는 생각에 참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정 옹이 다시 눈을 뜬 곳은 마산의 제2 육군병원 침상이었다.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살았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전장의 전우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더군요. 결국 제가 우리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가 됐습니다."
정 옹은 그 후 한미 양군 1개 연대 규모와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를 낸 양구 전투의 공적을 인정받아 1계급 특진과 함께 명예 하사로 제대했다."열심히 살려고 태어난 세상인데, 서로 이유도 모른 채 총질을 해대는 것이 전쟁이더군요. 이런 전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됩니다. 살아남은 미안함으로 평생을 사는 것은 우리 세대가 끝이어야 합니다."<천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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