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이민 111주년 이민 성지 하와이-어제와 오늘
▶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 도착 사진신부 받아들여 한인촌 형성, 대한인국민회 등 국권회복 앞장 남다른 교육열정으로 자녀 키워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인국민회(사진 왼쪽·현 한국독립문화원)와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조국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2014년은 미국 땅에 한인들이 첫 발을 내디딘 지 111년이 되는 해다. 미국을 여행할 때 “어느 소도시를 가도 한인이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한다. 신기함이 담긴 이 말 속엔 ‘한인의 놀라운 생명력’이란 경외도 담겼다. 200만에 달하는 미주 한인들이 이국땅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된 원천에는 바로‘하와이’가 있다. 111년 전인 1903년 1월13일은 겔릭호를 타고 온 첫 한인 이민선조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내린 날이다. 미주 한인 이민 111주년을 맞아 미주 한인사회의 이민 종가이자 성지인 하와이를 찾아 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봤다. <김형재 기자>
■한인 디아스포라, 포기할 수 없는 삶
하와이에는 미주 한인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한인 이민 111년 동안 인구가 1만3,959배로 늘어난 미주 한인들의 삶과 이야기의 시작이 하와이에 있다.
1902년 12월22일 감리교인 50명, 인천 제물포항 노동자 20명, 농부 등 전국에서 자원한 51명, 총 121명은 오늘날 여권인 ‘집조’를 손에 쥐고 미국 상선 겔릭호(Gaelic, Oriental and OccidentalSteamship Co.)에 올랐다. 선창가에 나온 존스 목사는 이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기도했다. 인천을 떠나 일본을 들른 겔릭호는 1903년 1월13일 오전 3시30분께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정박했다.
추운 겨울바다를 건너 호놀룰루에 도착한 102명(19명은 일본에서 신체검사에 걸려 귀환) 중 신체검사를 통과한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은 심정이 어땠을까. 이들은 도착 즉시 낯선 땅 오하우섬 북단 와이아루아·모쿠레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 이민사를 시작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온 초창기 한인 이민선조의 삶은 처절하고 고달팠다. 이들은 오하우(Ohau), 마우이(Maui), 카우아이(Kauai), 하와이(Hawaii) 섬에서 시간당 19센트라는 최저임금만 받고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고된 삶이었다. 그럼에도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까지 이민선조 7,226명(미주 한인이민 100년사)이 미국행을 택했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 고공덕, 천연희, 유분조 등 ‘사진신부’ 950여명은 한국에서 남편 될 남자(사진신부보다 10~30세나 많았다)의 사진만 보고 미국행 배를 탔다.
이민선조들은 사탕수수 농장 ‘노동계약’ 만료 후 현지 정착에 나섰다. 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하와이 후손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공부’를 강조했다”고 입을 모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강제병합마다 일본을 규탄하고 국권 회복운동에 나섰다. 농장 노동자, 세탁소 종업원, 벨보이, 집사, 일용직 등 힘든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간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수백만달러를 모금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하와이 오하우섬, 이민선조 발자취 간직
하와이 거주 한인 2세 마가릿 정(92)씨와 사료에 따르면 한인 이민선조들은 조국 독립에 힘쓰고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자 2세 교육에 헌신했다. ‘대한인국민회·동지회, 교회와 학교’는 한인사회 이민 공동체의 주요 소통장소로 활용됐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한인 이민선조들이 조직한 첫 단체는 1903년 8월7일 결성된 ‘신민회’지만 결성 1년여만에 내분으로 해체됐다. 1907년 이민선조들은 각 농장 동네에 형성된 ‘동회’와 24개 단체를 통합해 ‘한인 합성협회’를 조직했다.
합성협회는 미 본토 한인사회와 연대해 1909년 ‘대한인국민회’로 거듭나 1914년 밀러 스트릿에 회관을 마련했다. 1947년에는 루크 애비뉴(현 한국 독립문화원)로 이주했다. 합성협회와 대한인국민회는 ‘조국 국권회복, 재류동포의 안녕보장과 교육장려’ 활동을 펼쳤다.
2003년 1월14일 옛 국민회 건물과 부지는 상해 임시정부와 하와이 한인 이민선조 역사를 보여주는 4개 전시실을 갖춘 ‘한국 독립문화원’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반주택 조닝지역이란 한계로 공공시설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와 한인기독교회
대한인동지회는 1924년 우남 이승만을 중심으로 창설된 독립운동단체였다. 동지회 회원들은 하와이 동포사회 결속과 독립운동 자금조달, 상해 독립운동 지원, 한인 2세·3세의 교육업무를 주관했다.
동지회 창설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시작된 이민선조들의 조국 독립운동 방법론과 연관됐다. 당시 국민회 내부에서 이승만은 외교 독립론을, 안창호는 실력 양성론, 박용만은 무장 투쟁론을 주장하며 의견을 달리했다.
1910년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우남 이승만은 한인 감리교회에서 탈퇴했다. 이후 한인촌 지역에 한인기독교회 등 4개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겸비한 독립운동에 나선다. 1938년에 한인기독교회 릴리하 스트릿에 새 교회당을 지을 때 건물 전면을 광화문 모양으로 지었다. 현재까지 이 건물은 호놀룰루 중심가에 위치해 교회와 동지회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1903년 11월10일 하와이 리버 스트릿과 호텔 스트릿에 자리잡은 ‘한인 감리교 선교회’는 향수병을 달래고 조국 독립운동의 산실역할을 했다. 오늘날 이 선교회는 111주년을 기념하는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로 호놀룰루시 역사를 대표하는 장소가 됐다.
호놀룰루 앤 고바야시 시의원도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한국 전통문화와 미국 현대문화를 함께 지켜 왔다”며 “교회는 111년 동안 하와이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시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와히아와 한인촌과 한인교회
호놀룰루 북쪽 45마일가량 떨어진 내륙 소도시 와히아와는 초기 한인 이민사회 중심지였다. 사탕수수 노동계약을 끝난 이민선조들은 이곳에서 자영업과 파인애플 등 새로운 농업에 종사하며 한인촌을 형성했다. 1918년 와히아와 한인교회도 기미 독립선언서 서명 33명 중 한명인 박동완 목사가 35년 동안 재직하며 민족정신을 고취에 힘썼다. 이 교회는 하와이 한인 이민사 111년의 삶을 사진으로 전시 중이다.
▲한인기숙학교와 한인여학원 부지
이민선조들은 어려운 이민생활 속에서도 자녀를 위한 학교를 우선 세웠다. 1906년 한인 성금 2,000달러와 미감리교회 선교부 지원금 1만8000달러로 한인 기숙학교가 세워졌다. 1915년 이승만과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오하우 컨트리클럽 골프장 옆 3.5에이커 부지에 한인여학원을 설립한 뒤 남녀공학으로 확대, 1947년까지 한인 2세를 교육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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