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획 시리즈 / 한인사회 기관·단체 역사탐방 - LA 한인회 <하>
▶ 우여곡절 끝 1975년 현 한인회관 매입/입주, 주류사회와 채널, 한인 커뮤니티 입지 확대, 본국 정치상황·회장선거 내홍 따라 분열도, 한인사회 급성장 속 위상/역할 변해야
1971년 소니아 석 전 LA 한인회장(왼쪽 세 번째부터)이 한인회관 매입 지원금을 요청 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LA 한인회는 1975년 현재의 한인회관 건물을 구입하며 도약기를 맞았다. 위 사진은 1975년 구입 당시 한인회관의 모습.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어 창립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LA 한인회는 지난 46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인사회의 급성장과 함께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이민 트렌드속에서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다. LA 한인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해보는 기획 시리즈 두 번째 편으로 1970년대 중반 현 LA 한인회관 건물 구입 후 현재까지의 역사와 앞으로의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살펴본다.
<김형재 기자>
■1970년대 중반 도약기
▲현 한인회관 건물 구입
1975년은 LA 한인회에 큰 변화가 불어온 연도로 기록된다. 전년도 연말인 1974년 11월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된 7대 한인회장 선거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3,500여명이 투표에 참가, 양회직씨를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양 회장은 취임 직후 한인회관 매입에 박차를 가해 1975년 10월8일 30만달러에 매입 절차를 마무리 짓고11월22일 감격의 개관식을 가졌다.
현 LA 한인회관 건물 구입을 둘러싸고는 수많은 일화가 있었다.
1971년 4대 회장이었던 소니아 석(작고) 여사가 1975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각하, (한인회관 마련을 위한) 돈이나 좀 주세요”라고 요청해 지원을 받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그해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모금방문단의 일원으로 이학조 상의회장, 이민휘, 최희만, 배기생씨 등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한 석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대담하게도 한인회관 건립비용 지원을 요청했고, 석여사의 배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박 대통령은 즉석에서 15만달러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이후 석 여사를 위원장으로 한인회관건립위원회가 구성돼 건물 물색에나서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위원회 구성원들 중 조지 최 전 회장은웨스턴가의 현재의 건물을, 석 여사는 윌셔가의 건물을, 상공회의소 측에서나온 인사는 7가와 알바라도 길의 건물을 제시하며 협의를 계속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양회직 회장은 당시 LA 총영사였던 박영씨에게 도움을 청했고, 박 총영사는 석 여사 등을 설득해 웨스턴가의 건물 매입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에스크로에 들어가면서 법정 소송 해프닝 등을 겪은 뒤 결국 시가 30만달러에 매입이 완료됐다.
▲주류사회와 본격 채널
1975년은 LA 한인회가 최초로LA 시장실과 공식 채널을 만들고 주류사회와의 본격 교류에 나선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양회직 회장은 흑인 최초인 탐 브래들리 시장과 만난 자리에서 LA에 한인이 약 8만명 거주한다며 시 차원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후 1976년 8대 회장에 취임한 김형일씨는 LA 한인회 역사상 첫 중임회장 기록도 세웠다. 김기성씨는 9-10대(1977-78년)를 연임했으며, 1979년 구한모씨가 11대 회장에 올랐다. 김기성씨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한국정부와 미묘한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않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던 한인회는 구 회장을 끝으로 70년대를 마무리 지었다.
■1980-90년대 격동기
1980년대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열기와 맞물려 LA한인회도 변화와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 12대 이민휘 회장은 친 박정희파로 분류돼 야당 지지자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12~15대 한인회는 잦은 내부 갈등과 부정선거 여파로 사실상 업무중단 사태에 빠졌다.
침체기를 겪던 한인회는 1984년 LA올림픽(LA 한인사회 한국 대표선수단 지원)을 계기로 정상화 과정을 밟게 되는 듯 했지만 1987년 18대 회장선거 투표소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갈등이 심화됐다.
이 시기 LA 한인회는 한인사회 대표단체란 역할을 망각하고 내부 권력투쟁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인사회 봉사단체로 시작했지만 한인회가 갖는 상징성과 한국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신임 회장 선거철마다 극심한 갈등과 선거 후유증을 겪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인회는 1992년 4.29폭동 직후 구심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20대 이종원회장과 21대 김영태 회장은 21대 회장직을 놓고 법적소송까지 벌여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21대 김영태, 22대 장성길 회장들은 퇴임 후 한국 국회의원 도전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8년 24대서영석 회장은 한인사회와 합심해 한국 국회에서 ‘재외동포 특례법’이 제정되도록 앞장섰다.
■새로운 밀레니엄과 한인회의 미래
2000년대 한인회는 회장 선출을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2002년 26대 회장선거는 출마 후보 간자격 논쟁이 붙었고 2006년 28대회장 선거는 역대 선거 중 가장 치열하고 선거비가 많이 들어간 것으로 기록됐다.
2010년 30대 회장선거 때는 결과에 불복한 박요한씨가 또 다른 새로운 한인회를 출범시키는 해프닝을 벌였다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또한 28대 회장 선거 이후 한인회선거관리위원회는 매번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후 29~32대 한인회장들은 각종 시비 속에 모두 무투표로 당선됐다.
이같은 46년 역사의 LA 한인회는 본연의 역할은 기본 업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인회 공식 웹사이트(www.kafla.org)에 따르면 한인회는 첫째 주류사회와 한인사회 연결, 둘째 한인들 권리와 공익을 보호, 셋째 이민자 지원서비스, 넷째 분쟁 해결및 중재, 다섯째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에 나선다.
이밖에 소비자 관련문제 상담, 통역 및 서류작성 지원,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 정보제공 및 확인, 고용추천, 법률 및 사회복지 제도 상담, 세미나 및 웍샵, 사회복지 신청 지원 서비스도 제공한다.
지난 7월1일 제32대 LA 한인회장에 취임한 제임스 안씨는 “한인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봉사하는 리더십을 보여줄 것”이라며 한인회 재탄생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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