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자 없는 시간, 부부관계에 반드시 있어야
▶ 짧게 며칠부터 길게는 1년도 꼭 혼자 떠나 자아를 만나야 여건 안되면 당일 여행이라도
두 자녀를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김재용(57)씨는 10여 년전 캐나다 밴쿠버에서 6개월간 결혼안식년을 가진 적이 있다. 머리를 들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두통에 여러병원을 돌며 MRI와 CT를 찍어봤지만 이상이 없었다. 의사들은 그저 스트레스를 줄이라고만 권했다. 죽을 것처럼 몸이 아픈 것이 고작 스트레스때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던 김씨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둘째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기에 뭣도 모르고 좋다고 했죠. 결혼 승낙을 받으러 인사를 갔는데, 이 방에서 시동생이 나오고, 저 방에서 시누이가 나오고, 그 많은 식구에 온갖 대소사가 다 제 몫이었던 거예요. 제가 남편한테 약속한 거니까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막상 그렇게 살다 보니 너무 억울했어요. 돌아보니 나는 없고, 며느리, 엄마,아내라는 내 역할만 있더라고요.”‘나는 뭐지? 예전엔 꿈도 많았는데…’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하던 때,김씨는 우연히 문정희 시인의 시‘ 공항에서 쓸 편지’를 읽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안식년을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 ) 하지만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결혼안식년’이라는 개념은 김씨에게 구원이 됐다. ‘바로 이거다. 이게아니면 나는 죽는다. 나부터 살자’는절박함이 그의 내면에 가득했다. 밴쿠버로 조기유학을 떠나 있던 중학생딸아이를 돌본다는 명목을 대고 시어머니부터 설득했다. 중학생 아들은“누나한테도 한번 가봐야 하고 엄마도 많이 아프다”고 설명했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남편은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마음에 안 든다는 내색을 비쳤지만, 김씨의 치밀한 사전작업에 마지못해 오케이를 했다.
밴쿠버에서 김씨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아무 때나 일어나고 아무 때나자는 것을 결혼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실컷 해봤다.“ 시집살이 하면서보초병처럼 살았거든요. 언제든지 부르면 뛰어나가야 하니까 늘 옷을 입은 채로 자곤 했었죠.” 소나기가 오면맨몸으로 맞고, 맨발로 숲길을 걸어다니고, 털코트에 맨발로 샌들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다.
화장을 안 하면 밖에 나갈 수도 없다고 믿어온 세월은 그곳에서 끝났다.
이 온전한 자유 속에서 그의 두통은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남편은 한 달 만에“ 도저히 못하겠다. 당장 돌아와 달라”며 SOS를 쳤다.
이미 집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만의생활을 만끽하고 있는데, 돌발상황이었다. 김씨는 목소리를 깔고 “참아라.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단호함은우렁각시가 왔던 것처럼 당연하게 저절로 돼 있던 많은 일들이 실은 막대한 노동력의 투입 결과였음을 온 가족이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많은엄마들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없으면 집안이 엉망이 될까 봐’잖아요. 하지만 제가 해보니 엄마가 없으면 없는 대로 다 각자의 해야 할일들을 찾아서 하더라고요.”6개월간의 이별은 부부 사이에도변화를 불러왔다. 불타오르던가 물으니 그저 웃는다“. 늘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이런 게 안 되는구나서로 느낀 게 많았죠.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잖아요. 결혼안식년을 지내고 보니 그렇게 답답하기만하던 내 집도 더 애틋해지고, 이게 내자리였지 싶으면서 더 좋아지더라고요.” 김씨는 50세 생일에는 홀로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안식휴가를 가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에 결혼안식년을 권하며 여건이 정 안 되면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홀로 다녀올 것을추천한다“. 꼭 혼자여야 해요. 아무도없으면 내가 두 개의 나로 분리되잖아요. 나에게 말을 거는 나를 우리는반드시 만나야 해요.” 안식휴가를 통해 글을 쓰고 싶다는 옛 꿈을 되찾은김씨는 2014년 ‘엄마의 주례사’ (시루 발행)라는 책을 펴내며 수필가의꿈을 이뤘다.
▦배우자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제도가 위기에처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 사람과 해로하기엔 인간의 수명이 극적으로 길어졌고, 가부장제적 억압을더 이상 디폴트값으로 받아들이지않을 만큼은 여성 인권도 향상됐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랑하는 두사람이 일평생 모든 것을 함께한다는 결혼제도의 가정 자체가 오류다.
황혼 이혼의 약진이 이끌고 있는 높은 이혼율과 젊은 세대의 결혼 기피,졸혼에 대한 관심 고조 등은 모두 결혼제도의 약자인 여성이 견인하고 있지만, 반드시 여성만 결혼안식년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혼안식년이라고 해서 꼭 연간 단위의 별거를 일컫지는 않는다. 전문가에 따라 의견은 갈리지만, 영어권에서 ‘결혼안식기(marriage sabbatical)’라 부르는 일시적 별거는 짧게는 며칠부터 길게는 몇 년까지 제각기 다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기혼자의 나홀로 여행을 통해 이 경향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 13일 하나투어에 따르면, 40대 이상의 기혼자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매년 1월부터 11월까지 배우자를 두고 혼자 여행을떠난 40대 이상의 여행객 수는 2014년 7,100여명, 2015년 9,800여명에서올해는 1만2,000여명으로 대거 늘었다. 2년 사이 69%나 증가한 수치다.
이중 남성은 2014년 67.1%, 2015년64.5%, 올해 62%였으며, 여성은 2014년 32.9%, 2015년 35.5%, 올해 38%였다. 송원선 하나투어 홍보과장은“ 기혼자의 나홀로 여행은 남성이 여성보다 2배 정도 많지만, 여성의 비중이매년 늘어나는 증가세를 보이는 게특징”이라고 말했다.
결혼안식년이 아이디어로서는 매우 탁월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큰것은 바로 죄책감과 두려움이다. 책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안식 기간이 짧고 가까운 곳으로 떠난 사람들이 오랫동안 멀리 떠난 사람보다 더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안식년을 가진 남성은 대부분 죄책감보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는데, 저자는 이를“ 여성들은 허가를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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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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