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2>
▶ 뉴욕한인교회 성장에 기여한 인물들

존스 여사, 파이퍼 여사
■ 미여성후원회 조직, 교회건물 구입에도 큰 몫
■ 재벌 파이퍼여사, 교회 외 한인유학생들도 도와
■ 독립운동가 안정수 모금위원장으로 큰 활약

제1대 임종순 목사, 제2대 김영섭 목사, 안정수 모금위원장
뉴욕한인교회 초대 담임목사는 임종순 목사였다. 임 목사는 피츠버그에서 개최된 만국 장로교 총회(1921년 9월16일)에 참석차 1921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킴버랜드 여사가 이철원에게 보낸 편지에 임 목사를(박목사로 잘못 표기) 한인교회에 인도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임종순 목사(1875~1947)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숭실 전문학교와 평양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한국에서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다 1921년 뉴욕한인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던 학생과 하와이 농장에서 뉴욕에까지 와 망향의 설움을 달래던 노동자, 망국의 한을 품고 떠돌던 애국자들의 가슴에 복음을 전하며 소명의 큰 꿈을 심어준 목사였다,
여기에 초창기 교회의 기초를 반석에 세운 세 사람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존스 여사다. 교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이 킴버랜드 여사였다면, 교회가 계속 부흥하도록 도운 분이 존스 여사다.
존스 여사는 1890년 9월4일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파송을 받아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1885년 5월14일에 먼저 온 조지 허버 존스(George Huber Jones)가 마중을 나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 5월 결혼하여 선교사의 동반자가 되었다. 존스 여사의 청년 때 이름은 마가렛 J 벤젤(Margaret J. Bengel)이다.
존스 부인은 인천 영화 학당(지금의 영화 중고등 여학교)을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힘썼고, 그 남편 존스 목사는 1892년부터 1903년까지 10년 이상을 제물포 지방 감리사로 활약하며 그 지역의 44개 교회를 관리했다.
또한 문서 선교에도 힘썼고 한국 YMCA 창립 때도 주도적 역할을 했을 뿐아니라 인천 내리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하와이 노동 이민을 격려하여 그 교회의 교인들 다수가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뉴욕한인교회의 창립자로 교회 건물 구입에 앞장서, 당시 200달러를 헌금한 안정수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지도를 해준 인물이 존스 목사였다.
존스 목사는 1913년부터는 미감리회 해외 선교부 편집 및 협동 총무로 활약하며 한국 선교를 지원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 해외 선교부는 뉴욕에 있었으므로 미망인이 된 존스 여사는 뉴욕에 거주하며 킴버랜드 여사와 같이 한인교회 창립과 성장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존스 여사는 한국 선교의 연장으로 뉴욕한인교회를 돕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예로 존스 여사를 중심으로 1928년 5월2일 현 교회 건물에서 한국인을 돕는 미국인 여성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특히 경제공황이 시작되는 무렵,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 1929년에 취임한 윤병구 목사가 농사를 지으려 뉴저지로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계속 미여성후원회가 재정적 도움을 주어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조병옥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에 20년 동안이나 선교를 하던 존스 부인의 협력을 얻어 1만2,000달러의 보조금을 선교부로부터 받고 건물을 구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것이 매디슨 교회에서 2년간 예배를 드리던 한인교회가 439 West 21가에 자체 건물을 마련하고, 이때 뉴욕한인교회(Korean Church and Institute)라는 명칭을 썼다.
4층으로 된 건물에서 아랫층은 예배실, 윗층은 아파트로 두층에 25~30명의 교인들과 한인들이 거주할 수 있었다. 뉴욕연회에서 정식으로 김영섭 목사가 파송되었다. 김영섭 2대 목사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에 재학 중이었다. 1923년 파송을 받고, 1925년 공부를 마친 후 귀국하여 서울 중앙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한인 교회가 자기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도 존스 부인의 절대적 협력 덕분이었으며, 그 남편 존스 목사가 선교 담당 협동 총무로 있으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열풍을 일으킨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존스 여사는 당시 재벌이었던 파이퍼 여사를 미여성후원회 회원으로 받아드림으로써 경제 공황때 뉴욕한인교회를 상대로 큰 재정적 후원을 하게 된다.
또한 기억해야 할 사람은 안정수이다. 첫 한인교회 건물을 구입하기 위하여 5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안정수이다. 그는 충남 홍성 출신으로 1897년 당시 인천 내리 교회의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한인 이민을 추진하다가 1903년 1차로 1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떠날 때, 통역관으로 하와이에 오게 됐다.
애국심에 불타있던 청년 안정수는 윤병구, 홍승하와 같이 신민회를 조직하고 그 해(1903) 말 11월에 하와이 그리스도 교회를 최초 창립한다. 후에 윤병구는 목사가 되어 뉴욕한인교회 3대 목사로 부임했다.
김용원에 의하면 안정수는 1907년 7월25일 뉴욕 한인공제회를 조직해 조국의 독립운동 등을 펼쳤다. 그리고 교민단을 만들어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 그는 사업에도 성공하여 1927년 현 건물을 구입하는 데에도 모금위원장으로 앞장섰고 남몰래 유학생들을 재정적으로 돕기도 했다. 이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1927년 현재의 교회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1927년 10월 맨하탄 115 스트릿(633 West. 115 St. New York)에 4층 건물을 마련하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현재 재건축 완공 단계에 있고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로부터 독립유적지라는 인정을 받게 됐다.

1923년 뉴욕한인교회가 최초로 마련한 맨하탄의 교회건물

100여년 들려준 뉴욕의 소리
<
장철우/목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