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네살에서 다섯살로 넘어가던 해의 크리스마스였다. 성탄전야 예배에 가기 위해 아파트를 나섰다. 딸과 아내를 먼저 내보내고 문을 닫는 척 하면서 현관 클라젯 안에 높이 감춰두었던 선물을 거실 귀퉁이의 트리 장식 밑에 옮겨놓았다. 원 앤 덴(One & Den)의 작은 아파트였기에 아내와 딸이 계단 두 칸도 내려가기 전에 전광석화로 해치울 수 있었다.
교회에서 돌아온 시각은 제법 늦었다. 잠이 들어 계속 자꾸 까부라지는 애를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흔들어 깨웠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트리 밑에 놓인 선물꾸러미를 본 딸아이는 너무 놀라 자지러졌다. 오 마이, 자기가 착한 아이란 걸 알아주신 산타 할아버지! 우리도 너무 신기하다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런 부부사기단 같으니라고.
벽난로가 없는 우리집에 산타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감격 못지 않게 그 궁금증 역시 산처럼 쌓였다. 그런데 마침 그 해에 나온 영화 한편이 모든 걸 풀어줬다. 홈 임프루브먼트 시리즈로 인기를 누리던 팀 앨런이 산타가 되어가는 아빠 역을 맡은
다.
1994년 11월에 개봉한 이 디즈니 영화는 코믹하면서 따뜻한 가족물로 흥행에 성공해서 이후 속편들이 제작됐다. 우리집에도 비디오를 사서 수시로 아이한테 틀어줬다.
영화에서 보면 산타의 매직으로 못 할 게 없다. 없는 벽난로를 만들어 들어가는 건 식은 죽먹기다. 뚱뚱한 산타 몸집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좁은 굴뚝으로 쏙! 그리하여 모든 미스테리가 풀렸다.
그로부터 이십년이 다 되어가던 해의 크리스마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독립한 딸이 집에 돌아왔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던 중에 산타 얘기가 나왔다. 너 어렸을 적 우리 폴스처치의 아파트 살 적에… 비밀의 봉인을 뜯었다. 또다시 오 마이! 탄성이 터졌다. 울 딸한테는 그때까지도 미스터리였다는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증거를 자기 두 눈으로 확인했던 딸은 초등학교에 올라가 이 시즌이 되면 벌어지는 산타 공방전에서 늘 산타를 편들었단다. 영민하고 까진 애들은 산타는 없고 아빠의 수작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으니 울 딸처럼 순진하고 띨띨한 산타파 아이들을 알라 취급하고 낮춰봤을 것이 눈에 선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빠파가 득세하고 산타파는 쪼그라드는데, 딸내미는 어느 순간부터는 산타 시시비비에서 발을 뺐지만 속내는 결코 승복하지 않았단다.
이십년을 멍청하게 속았는데도 딸은 별로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았다. 혼자 씨익 웃는 폼에, 난 그때 알았다. 염화시중에 곽시쌍부라고 말없는 가운데 가문의 비급이 전수되었음을.
이제 내게도 손녀가 생겨 크리스마스에 11개월이 된다. 내년은 몰라도 내후년이면 산타를 찾지 않을까. 엄마 닮았다면, 더 올라가 이 외할아버지 닮았다면 아마 내 손녀 역시 모지라고 띨띨한 산타파가 되어 12월 내내 울지도 않고 떼도 안쓰고 엄마 아빠 말 잘 들을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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