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에 유채를 씻었다. 4월 초의 유채는 끝물이다.
내 고향에서는 이 채소를 ‘하루나’라고 부른다. 입춘 지나 우수 경칩 무렵부터 여린 새순을 무쳐 먹는 것으로 시작해 갖가지 음식의 주·조연으로 변주하는 고마운 식재료다. 뿌리는 달고 잎은 고소하다.
지금 이 무렵이 먹거리 채소로는 끝이지만 설령 때를 놓쳐도 크게 아쉬울 건 없다. 아이들 키만큼 자란 채소에 동이 서고 거기서 피어난 노란 꽃이 봄바람에 산들거릴 때, 밭고랑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일은 지금도 종종 꿈에 나타날 만큼 배부른 추억이다. 시간만 철철 넘쳐흐르던 가난한 시골 아이들에게 그만한 풍요와 사치가 또 있을까. 그 꽃이 진 자리에 들어선 씨를 모아서 방앗간에 맡기면 샛노란 기름이 만들어졌다.
겨울 칼바람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신학기 무렵이면 엄마는 아침에 하루나 된장국을 자주 끓였다. 커다란 무쇠솥에 쌀뜨물과 멸치를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밭에서 막 뜯어낸 하루나와 장독대에서 퍼 온 된장을 풀었다. 여기에 사자어금니처럼 아끼는 조개젓 두어 숟가락 넣어주면 끝. 십 리 등굣길을 서둘러야 하는 우리 형제들은 김이 설설 오르는 하루나 된장국에 뜨거운 밥을 말아서 후후 불며 먹었다.
그러고는 매일 아침 아버지가 짜서 양은 냄비에 데워둔 산양 젖 한 컵씩을 차례차례 들이켠 후 집을 나섰다. 그렇게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은 날에는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쳐도 몸이 차가워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하루나가 예사 채소니? 그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 기름기 담뿍 머금은 잎과 줄기를 키워내잖니. 뿌리며 잎사귀며 꽃에다 씨앗까지, 생각해보면 이 식물은 단 하나도 버릴 데가 없구나. 영물이 따로 없는 셈이야.”
힘든 겨울이었다. 이 꼴 저 꼴, 웬만한 충격에는 이력이 생겼다고 믿었는데 아무 때나 울증이 치밀고 입맛까지 달아났다. 그 겨우내, 엄마는 자식들을 유난스럽게 챙겼다. 고향 집 방문마저 뜸해진 자식들에게 시시때때로 택배 상자를 부쳤다. 봄동이며 쪽파, 호박, 오이, 미나리가 들어있는 상자 한쪽에 싱싱한 유채를 꼬박꼬박 넣어 보내며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올해 마지막이 될 유채로는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통마늘과 유채를 아낌없이 넣고 잣과 새우로 멋을 낸 파스타는 기름지게 맛있었다. 뜨끈뜨끈한 파스타를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나서 창밖을 보니 며칠 사이 매화가 만개했다. 유채꽃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 밭에 심은 하루나 말야. 길 안쪽은 꽃 필 때까지 그냥 남겨두기로 했잖어. 지금 그 밭 상황은 어때?” 엄마가 큭큭 웃었다. “막 꽃망울이 맺히고 있어. 이번 주말에는 노란 꽃이 지천으로 피어날 듯싶다만. 어때? 계절이 변해서 하루나 꽃도 피고 있으니 이제 자식들 얼굴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도 되는지 몰라.” 대답 대신 나도 오랜만에 크크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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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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