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 멜빌의 모비 딕(Moby-Dick)을 마쳤다. 마침내, 비로소, 급기야, 기어이 그런 부사를 마쳤다 앞에 붙여야겠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나름의 장정이었다. 언젠가는(죽기 전이라는 표현은 지양하자) 읽어야 할 목록에서 하나를 지워냈으니까.
문학적 도전, 그런 거 아니다. 장돌뱅이에게 무슨. 소싯적 문청 시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민 와서 살다가 품게 된 소망이었을 뿐. 사연은 있다.
한인 교회를 더이상 다니지 않으면서, 그래도 미련이 있던 2004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마음의 빚이 있고 그곳에서 만난 분들을 좋아하면서도 발길을 돌린 것은 한인교회 신앙의 보수성이 버거워서였다. 특히나 강요하다시피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감내하기 힘들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는데 속으로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다니면 안 되는 것인가. 부활이 의심되면 크리스찬이 아닌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데, 그것도 형체도 애매하게, 그게 그렇게 쉽게 믿어지나. 그런 게 오히려 자기 기만 아닌가.
그래서 찾아가본 곳이 유니테리안 교회였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아도 된다고, 이성을 좇아 의심할 건 의심해도 된다고 들어서다. 뉴에이지 계통의 새로운 흐름은 아니고, 미국 독립 전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계몽시대의 산물이다. 딸의 로스쿨 졸업식이 있는 보스턴에 갔더니 옛 시가에 큰 교회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페어팩스 내에서도 잘 사는 동네의 한적한 숲속에 자리잡은 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는 유스 그룹에 보내고 혼자 예배당 뒷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새 신자냐며 요란하게 반기는 호들갑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영어였다. 눈치껏 따라서 일어났다 앉았다는 하지만 마치 탁한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답답함이 무거웠다.
목사의 설교 시간이 되었다. 방문 관찰의 주목표였으니 정신을 바짝 차렸는데 첫 마디가 이랬다. 오늘의 주제는 모비 딕입니다….
화려하지 않으나 세련된 옷차림의 회중들 얼굴에서 환한 웃음기가 번졌다. 다들 아는 내용, 다들 읽은 소설, 다들 할 말이 많은 서사. 반 시간 넘는 설교 내내 회당 안에는 생기가 넘쳤는데… 굳이 영어가 아니어도 모비 딕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던 나로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고래사냥, 그 정도야 알지. 주말의 명화에서 그레고리 펙을 보기도 했고. 줄거리는 학생잡지에 실렸던 만화로 접했는데 제목은 ‘백경’이었겠지. 그렇게 만화로 때운 고전은 이제 제목만 기억나는데 ‘폭풍의 언덕’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내 영어 실력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미련 없이 다음 주 출석은 포기했는데 아쉬움은 남았다. 친교 시간에 모비 딕을 얘기하며 오늘 설교 좋았다 어쨌다 담소 나누는 그들이 부러웠다. 유니테리안 교회 성원들이 대개 리버럴한 중산층이다. 아득해만 보이는, 그러니까 내게는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이랄까.
모비 딕이 그런 책이었다. 19세기 중반의 소설이 아직도 이렇게 열렬히 사랑을 받는다니. 그때 인상이 지워지지 않아 책을 구했다. 문제는 다시 영어다. 왜 이렇게 어렵나. 19세기 영어라서 그런 건가. 장엄한데 버겁다. 첫 챕터를 못 마치고서 포기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게 된, 은퇴하신 영문학자 설준규 교수님께 모비 딕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다. 다들 그렇다, 첫번째 챕터만 넘기면 그 뒤로는 괜찮다며 용기를 주셨다. 음, 느낌에 공부 어중간한 고등학생 응원하는 서울대생 과외선생님이랄까.
그래도 그 격려에 힘 얻어 올 봄 재도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첨단무기를 장착했다. 무조건 돌파! 들으면서 읽는 양동작전이다. 스마트폰의 북스 앱에서 무료 다운한 이북 전자책, 페어팩스 도서관의 리비 앱으로 대여한 오디오북. 아이폰 안에서 다 해결한 것이다. 모비 딕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모르는 단어 나와도 찾을 여유는 없다. 무조건 맥락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사전 찾다가는 진도 안 나간다. 이렇게 무식하게 밀어붙였는데, 오디오북 나레이터의 유려한 목소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찾아보니 고인이 된 연극배우 프랭크 뮬러. 고전물, 스티븐 킹, 존 그리샴의 여러 소설을 목소리로 남겼다.
그래서 모비 딕이 어쨌느냐고 묻지 마시라. 마친 것 하나로 행복하다. 스타벅스 커피샵이 이름을 따왔다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을 만났고, 퀘이커 교도들이 고래잡이로 부를 일궜다는 고급휴양지 낸터켓 섬도 가본 거나 다름없다.
우리 가족이 즐겨 찾는 케밥 식당이 모비 딕이다. 고래는 구경도 못해봤을 이란 출신 이민자가 자기 체인점에 그 이름을 땄듯이 모비 딕은 미국땅 여기저기에 살아 있고 그 이름 부르는데 나도 이제 거침이 없게 됐으니 그걸로 됐다. 그래, 나 모비 딕 읽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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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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