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천(瓮遷)
▶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독벼루) 국립중앙박물관
넘실대는 거친 바다 불뚝 솟은 바위산
큰 독 엎어 놓은 듯 독벼루라 한다네
굽이굽이 아찔아찔 벼랑길은 까마득
나귀 탄 선비님들 어찌 저길 가려 하나
나귀도 겁이 나서 앞발 들고 뒷걸음질
험한 길 가기 전에 한잔하며 쉬고 가세
금강산에서 해금강에 가려면 동쪽 해안을 따라 통천(通川)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그 길에는 바닷가에 불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는데, 마치 큰 독을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독벼루, 즉 옹천(瓮遷)이라고 불린다.
옹천의 가파른 바위 절벽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걸어갈 수 있는 잔도(棧道, 좁은 길)가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넘실대는 동해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잔도를 걸어가는 것은 사람이나 나귀에게나 두려운 일이어서, 웬만한 담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곳을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말, 강원도 통천과 고성 지방에 침입한 왜적을 군민들이 이곳으로 유인하고 기습하여 전멸시켰다는 통쾌한 역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겸재가 해금강에 가기 위해 험하지 않은 내륙의 길로 멀리 돌아가는 대신, 일반 사람들도 무서워하는 이 지름길이자 절경을 선택한 것은 가보기 힘든 명승(名勝)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그의 예술가적 집념과 두둑한 배짱을 보여준다.
겸재는 진경산수화 특유의 강한 기세로 옹천을 호쾌하게 그려냈다. 붓을 옆으로 쓸어내리는 필법과 수직준(垂直皴)을 사용하여 바위산의 거칠고 가파른 모습과 웅장함을 표현했고, 크고 작은 바위들을 왼쪽에 그려 넣어 험준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넘실대는 동해의 파도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겹겹이 포개어 그림으로써 거친 바다를 오히려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게 했고, 바닷가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가 만드는 하얀 포말(泡沫)은 그림에 생동감과 활력을 더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좁은 절벽 길을 혼자 조심조심 걸어가는 선비 한 사람이 보인다. 아마 나귀를 타고 가기가 겁이 나서 나귀 따로, 사람 따로 걸어가기로 한 듯하다. 겸재는 좁은 길에 점을 찍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임을 표시하는 독특한 화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림을 보는 이가 그림에 몰입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독벼루를 넘기 전에 선비와 시종, 그리고 나귀가 잠시 쉬어 가는 모습도 그렸다. 그림 아래의 작은 언덕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그림 전체가 다소 건조하고 밋밋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나귀를 탄 채 시동과 함께 가는 갓 쓴 선비의 모습도 보인다. 아마 겸재 자신일 것이다. 옹천의 거대한 바위가 주는 중압감 앞에 나지막한 언덕과 소나무, 여유로운 인물들을 배치했고, 옹천 꼭대기의 평탄한 곳에 소나무들을 그려 넣어 긴장감을 덜어주고 그림 전체의 조화를 살린 구도는 참으로 절묘하다. 언덕 위에 작은 정자가 있었더라면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 그림을 한양의 사대부 사랑방에 걸어 놓고 선비들이 함께 보며 ‘와! 정말 겁나는 곳이구먼,’ 또는 ‘난 무서워서 못 가겠네’라고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듯하다. 이 얼마나 즐거운 사랑방 모임이었겠는가.
또한 겸재는 비밀스럽고 사소한 모습을 그림 속에 숨겨 놓는 깨알 같은 유머가 있었다. 이 그림 속 어딘가에 살짝 보이는 나귀의 엉덩이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joseonky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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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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