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남자의 “파”!,
물론 이 파는 계이름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파가 아닌 밭에서 재배하며 향취가 있고 여름에는 백록색 꽃이 피는, 약과 요리에 널리 쓰이는 식용풀을 말한다.
한달 전쯤 한 50대 여자 선배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장에만 가면 마누라를 따라 온 머리가 히끗 히끗한 늙은 남자들을 보게되는데 ‘우리 파 사야해’ 하고 작게 말하는 그 목소리가 그리 가여울 수가 없어.”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 파 떨어졌어, 파 사가야 해.”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가 들리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돌아서니 눈에 그림처럼 그 모습이 잡혔다.
평생 처자식을 위해 일하다 나이 들어 늙고 뚱뚱해진 마누라를 따라 생전처음 장에 와보았을 50대 중반이나 후반의 남자. 몸이 늙고 보니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을 갔고 은퇴하고 보니 딱히 할 일이 없어져 기운도 기회도 없어 힘없이 고개 숙인 남자들.
8.15 해방이나 6.25전쟁을 서너 살 나이에 겪고 그 혼란의 와중에서 용케 살아남아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치자”는 대통령 선거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배고픈 60년대 보릿고개를 넘자 근대화정책에 따라 “새벽종이 울렸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로 훈육된 세대.
그들 중에는 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과 경제를 이끈 선두주자로서 야근과 철야도 마다 않고 개미처럼 일하던 직장 문화에 젖어 있다가 80년대의 풍요로운 소비시대를 지나 90년대 들어 정보혁명, 구조조정, 정년 단축에 등 떠밀려 미국에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1965년 개정이민법을 따라 이민 온 올드 타이머지만 “이 나이까지 먹고 산 것만 해도 용타.” 할 정도로 세월의 덫에 치인 사람, 높은 학력· 좋은 직장 다 잊고 범죄율 높은 저소득층 거주지에서 절약과 장시간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 한국에서는 장사라고는 근처에도 안 가보았던 사람이 생전 처음 길가에 나와 코피 터져 가며 언어장애, 문화 차이, 인종 차별에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을 그들.
그들은 70년대 초반부터 한인 비즈니스가 확대되고 후반에는 소매업계가 더욱 활성화되면서 속출한 한인들간 과당경쟁과 사기 사건, 한인회장·교육위원·시의원 등 선거 열풍, 9.18 평화대회 등 이런 저런 이민사를 직접 엮어왔다.
몸은 미국 땅에 살면서도 한국의 수재나 가뭄, IMF 재난 시 성금 보내는 것을 잊지 않고 한국 가곡의 밤이나 국악인 공연을 볼 때면 자신이 조국에 대한 향수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이민 1세대들이다, 이들은.
젊어서 미국에 왔건 나이가 들어서 왔건 자기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이들은 언어가 낯설고 갈 곳이 한정되어 있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속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도 다 한국에 두고 왔다 하자.
사회에서 할 일이 없다보니 가정에서도 권위와 힘이 미약해지고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젊어서 호리호리 하던 마누라가 어느새 감당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진 덩치와 기세에 눌려 장에 따라가는 일이 주중 큰 일이 되어버린 중년이후의 남자들.
나는 이제 끝났다는 상실감, 다가올 노년기에 대한 두려움, 볼 아이가 없으니 주위의 적막함과 남아도는 시간에의 외로움으로 때로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선배의 한 마디 말이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 지난 주말 장에 가서는 장 보러온 50대 중반 남자들의 가늘어진 뒷목과 작아진 몸피를 보며 ‘저 사람도 젊었을 때는 든든한 등과 굵은 목을 지녔겠지’ 하다가, 그러니까 중년이후 남자들의 ‘파’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정작 나는 파만 빼놓고 장을 보고 말았다.
주말에 1주일치 장을 보기때문에 퇴근 후인 평일에 장에 가기는 쉽지 않아 육개장을 잔뜩 끓여놓고는 파 없이 먹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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