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큰 데모 일어났다는 소식 들었어? 빨리 TV를 틀어봐."
1980년 5월. 워싱턴 D.C.에서 델리샵을 하는 이동희씨에게 한 지인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재빨리 TV를 켜자 화면에는 김대중씨가 잡혀갔고 시민들이 군인들과 대치중이라는 뉴스가 속속 방영됐다. 학생들이 군인들에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는 장면도 나왔다.
서른일곱 곱상한 청년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팔뚝에 알 수 없는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웬일인지 광주학생운동이 떠올랐어요. 왜정에 대항하던 그 정의의 학생들 말이에요…."
집권욕에 눈이 먼 전두환 신군부가 동족들의 가슴을 향해 겨눈 피의‘광주사태’는 그렇게 미국에 이민온 지 1년밖에 안된 동포에게 전해졌다.
광주의 참상이 전해지자 호남인들이 모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음해 2월20일. 전북 고창 출신인 이씨도 모임장소인 폴스처치의 비원식당으로 달려갔다.
“처음 예약해놓은 식당에서 갑자기 못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아마 어디선가 압력을 받은 모양이지요. 그래서 동창회를 한다며 거짓말을 하고 비원식당에서 행사를 가진 겁니다." 식당을 메운 2백명의 눈동자에는 범접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떤 이는‘나의 고향’이란 동요 가사를 바꿔 5월의 아픔을 노래했다.
“호남땅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가, 동족에 이럴 순 없다며 우리는 한마음이었습니다. 눈물로 한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연수씨를 초대회장으로 호남향우회를 결성했다.
85년 5월 이씨는 6년만에 단신으로 고국을 찾았다. 비즈니스 초창기라 정신없이 바빴지만‘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를 광주로 이끌었다. 광주는 아직도 해금되지 않았다. 금남로며 충장로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은 어둠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여전히 국가원수였다.
삼엄한 망월동으로 향했다. 그 무덤밭에서 망연히 서있었습니다. 꽃잎처럼 떨어진 님들에게 당신들은 의로웠습니다,라고 속으로만 외쳤습니다."
88년 두 번째 방한에는 부인과 두 아들도 동행했다. 역시 망월동을 찾아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에게 역사를 이야기했다.
올해로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지 23년이 흘렀다. 예순에 접어든 이동희씨의 희끗해진 머리칼만큼이나 세상은 바뀌었다.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란 역사적 대의를 획득했고 희생자들은 대한민국의 정당한 국민으로 복권됐다.
워싱턴에도 변화는 찾아왔다. 몇해 전부터 호남인들만의 추모식은 전 한인들의 기념식으로 탈바꿈했다.
올해 기념식은 오는 18일(일) 오전 10시30분 애난데일의 메이슨 디스트릭 파크에서 열린다. 이번에는 그가 호남향우회장이다. "동서로 찢겨진 나라입니다. 지난 대선때 호남인들은 마음을 모아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동서화합, 그것이야말로 광주항쟁의 참 정신입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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