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의 장기집권에 국민들은 염증을 내고 있었다. 장기집권에 반드시 따르는 건 부패. 정치뇌물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집권당이지만 야당인 노동당은 더 무기력했다. 그 결과 선거에서 계속 패하기만 했다. 해서 한 때 나온 전망은 보수-노동 양당정치는 막을 내릴 것이라는 거였다. 21세기 들어 영국은 보수당 일당체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당에 새 바람이 불었다. 그 주인공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40대인 이들이 노동당 개혁의 깃발을 쳐들고 나오면서 정치의 활력소로 등장한 것이다.
1994년 5월의 어느 날. 이 둘은 런던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따로 만났다. 당시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가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벌어진 당권 경쟁과 관련된 담판이었다.
모인 장소가 그리니타 식당이었다. 그 식당 이름을 따 영국의 언론들은 그 날의 일을 ‘그리니타 회동’이라고 부른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당내 서열은 브라운이 위였다. 이 회동에서 브라운이 양보를 했다. 당권경쟁에서 블레어를 밀기로 한 것. 그리고 노동당이 총선서 승리하고 2기 연속집권을 하면 그 때에 총리직을 이어 받기로 한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다한 공개적인 비밀로, 이 회동은 보수당의 당권투쟁에 식상한 영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언더 독’의 입장에서 고지를 선점한 블레어는 유능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메이컵에 성공했다. 양보한 브라운은 인품이 갖추어진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듣게 된 것이다.
이 둘이 이끈 노동당은 1997년 총선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이후 블레어는 총리로서, 브라운은 재무상으로서 영국을 유럽에서 가장 경제 성장률이 높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상 처음 노동당 3기 연속집권의 기록도 세웠다.
블레어는 12년 전 그 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라이벌이었던 브라운을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브라운의 당수 취임은 확정적이다.
한나라당의 분열위기가 봉합됐다. 대통령후보 경선 룰과 관련해 이명박씨가 양보를 해서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좌파정권 종식을 위한 대동단결 원칙에 합의를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전망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볼일’이라는 식의. 왜 그토록 회의적일까. YS와 DJ 스토리가 배경을 이루는 게 한국정치이기 때문 같다.
그건 그렇고 한국판 ‘그리니타 회동’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것인가. 대선 정국과 관련해 한번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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