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이게 누구야. 살아 있으니 이렇게 미국 땅에서 만나는구나.”
15일 한국전참전유공전우회 총회가 열린 팰리스 식당에서 예비역 준장 김정윤(75), 예비역 소령 정구창(75)씨는 얼싸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옛 전우를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눴다.
백발의 두 노병은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육군종합학교 29기생으로 군문에 함께 들어간 동기생.
당시 육군종합학교는 전쟁 발발 후 절대 부족하던 초급장교 충원을 위해 1950년 8월 부산 동래에 설치한 단기 군사 학교. 급박한 전황상 6주-18주의 교육을 시킨 뒤 소위로 임관한 뒤 전선에 투입됐다.
김씨와 정씨는 내무반을 함께 쓰며 동고동락하다 7월7일 임관, 전장을 누볐다. 수도사단에 배속된 김씨는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나들다 69년에는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28사단의 연대장을 거쳐 82년 울산지구 경비사령관(준장)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었다.
정씨는 7사단 8연대 수색소대장으로 배치된 후 철원, 양구 일대에서 사투를 벌였다. 휴전 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하다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차출돼 63년 소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몸을 담았다. 경찰복으로 갈아입은 정씨는 이후 서울시경과 경기도경 정보과장, 용산과 동대문경찰서장등을 지내다 76년 사직했다.
두 동기생의 인연은 이때까지 지속됐다. 정씨는 “내가 29기생들의 모임인 7.7회 회장을 맡은 관계로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이듬해 미국 이민을 오면서 소식이 끊겼다”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봤다.
그 후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90년대 초반, 우연찮게도 메릴랜드의 몽고메리침례교회(현 에벤에셀침례교회)에서였다. 당시 메릴랜드에 살던 아들과 딸네 집에 잠시 들렀던 김씨가 주일 예배차 이 교회에 들렀다 안수집사로 있던 정씨를 만난 것이다. 김씨 역시 장로를 지낸 독실한 교인이었다.
재회의 시간은 짧았다. 김씨는 이내 귀국했다. 그러다 2년 전 김씨가 다시 미국에 영주하러 오면서 인연은 이번 한국전 전우회 행사에서 이어졌다.
버지니아 버크에 정착한 김씨는 “정구창 동기가 보고 싶었지만 마땅히 찾을 길도 없어 그냥 지냈다”며 “전우회 행사에 가면 혹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정말 만나게 돼 너무 기쁘다”고 환하게 웃었다. 정씨도 “그때 헤어진 후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 가슴이 벅차다”며 동기생의 손을 잡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그들이 거쳐 온 전쟁과 전우들을 회상하고 생존해 있는 동기생들을 화제로 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 노병은 “우리에게 남은 인생이 길지 않다”며 “앞으로는 자주 만나 회포를 풀자”고 어깨동무를 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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