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2차 대전이 종전되던 1945년 3월에 나는 낙동강 소읍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여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일본이 패전(敗戰), 학제(學制)가 변경되면서 영어가 필수과목이 되어 영어사전을 너도 나도 가져야 했다. 어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두텁고 무게도 많아 당연히 내용도 풍부한 아기 베개만 한 영어사전을 어렵게 구입,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갔던 학기 초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사전이 보이지 않았다. 집안 어딘가에 있겠지 하고 여유만만 했던 나는 먼 친척 아저씨가 와서 나의 허락도 없이 가져간 것을 알고 얼마나 화가 났던지, 훔쳐 간 것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김해에 살고 있는 그 아저씨 집엘 찾아가 봤자 사전은 팔아버리고 없을 것이고 그 당시 교통사정은 지금처럼 팔방사통달(八方四通達)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빨만 갈고 있어야 했다.
그 전에도 그 친척은 특별한 볼 일도 없으면서 자주 우리 집에 들러 서성이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싫어했었다. 더 더욱 그 전에 마운트가 없는 콩알 크기의 다이아몬드와 오벌 형 일본 기모노 오비도메 라이마 빈 2개 크기의 다이아몬드로 된 것을 가지고 가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그 귀중한 보석을 장롱 서랍에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서 가지고 놀다가 도로 자물쇠도 없이 서랍에 넣어 두곤 했었다. 다이아몬드의 가격도 가치도 알 리 없는 나는 에밀 갈레(Emile Galle, 불란서 유리 공예품의 장인)가 만든 화려한 유리 공예품쯤으로 알고, 초록색 실로 짠 주머니에 동전 등과 함께 넣어 뒀었다.
아저씨가 사전을 가지고 간 후 새로 구입한 것이 일본 삼성당 발행의 화영(和英) 사전이다. 이때부터 나는 사전에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던 벽지 전문 점포에서 갈포지(칡뿌리를 원료로 사용함)를 사다가 방 벽지로 사용하고 나머지 자투리로 사전에 옷을 입혔다.
그 다음 미국에 와서부터는 10수년을 변함없이 나에게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으로 가득 찬 달력을 보내주는 이가 있어 그것으로 사계절 옷을 갈아 입혔고, 지금은 2년 전 고려대학서 발행된 달력 황금색 은행나무의 옷을 입고 있다.
사전이란 어떤 책보다도 소중하고 누구에게나 꼭 있어야 할 책이다. 많지 않은 나의 사전 중 내가 가장 아끼며 애용하고 있는 사전은 친정아버님이 쓰고 계셨던 한일옥편(韓日玉篇)인데 앞뒤장이 떨어져 나가서 발행 연도와 발행처도 알 수 없는 사전이다. 그리고 오래된 지질(紙質)은 변질되고 섬유질이 약화돼 황토색으로 변했고 책장을 넘길 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사전 가장자리가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내용이 현대에 보기 드물게 한문 한글(옛 한글), 일어 발음까지 쓰여 있고, 한자의 정자(正字) 밑에 약자(略字)까지 있고 뜻풀이도 상세히 나와 있어서 참 편리하다. 원래 이 옥편은 검은 면으로 된 천으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래 돼 내가 50년 전 안은 엷은 흑색 면(綿), 겉은 아이보리 톤의 양질의 비닐 이중으로 된 옷을 입혔는데 아직도 건재하다.
또 한 권 자매같이 아이보리 톤의 옷을 입고 한 손 안에 쉽게 들어가면서 500 페이지가 넘는 앙증스런 고사금언(故事金言) 소사전, 1968년에 신판이 발행되었지만 내가 지금 애용하고 있는 것은 1972년 발간된 54판(版)이다. 아버님이 소장하셨던 한일옥편 손수 쓰신 목차 1획부터 13획까지 그리고 그 옆 골판지에 쓰인 ‘장성일면 용용수 대야동두 점점산(長城一面湧湧水 大野東頭 點點山)’이란 어구(語句)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임경전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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