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되었었던 부음(訃音)이었지만 이렇게 큰 분을 잃었다 생각하니 어디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얼마든지 한인사회를 위해 좋은 일 더 해줄 수 있으셨는데 병마에 이렇게 떠나시다니 애석하옵니다.
윤 부제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근대 한국역사의 축소판인 것 같군요.
6.25 전쟁 통에 문교부 고위 공무원이셨던 부친을 공산도배들에게 빼앗기시고 생사조차 현재까지도 모르시는 가족의 비극을 달래며 그동안 그야말로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아오셨잖습니까? 부친께서 납북되신 후 모친과 어린 여러 동생들을 갑자기 책임져야하는 어린가장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모든 고난을 꿋꿋이 헤치고 살아남아 여기까지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병마를 극복하시지는 못하셨군요. 애석하고 애석합니다.
연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시고 우등졸업과 함께 장학금으로 1960년대 초 미국 유학길에 올라 워싱턴에 정착 후 그 당시 가난했던 조국 대한민국에서 온 다른 유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공부하랴, 생활비 조달과 고국의 가족들 부양을 위해 밤에는 택시운전이며 식당 종업원노릇을 하며 경제학석사를 아메리칸 대학에서 받으신 후 공인회계사 자격취득과 함께 DC정부의 감사관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지요. 훗날 신학교에 입학하시어 한인으로는 아마도 워싱턴 지역에선 처음으로 종신부제가 되셨지요.
이곳 한, 미 종교계를 비롯 이민 한인 사회의 숨은 봉사자로서, 모범적인 지도자로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셨지요.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 신자들을 위해 특히 병자들의 영성적 지도를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기에 오죽 감사한 마음들이였으면 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한국과 한국인들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고 했다고들 하지 않았습니까? 관직만 없다 뿐이지 어느 외교관 못지않게 국위를 선양하고 한미 민간 친선에 기여한 분이 바로 윤 부제님 아니십니까?
온갖 고난으로 시작되었던 인생이었으나 봉사와 희생으로 점철된 영광과 축복으로 마지막 인생을 장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누가 뭐라해도 47년간의 반려자 미세스 윤의 내조이겠지요.
이제 우리 곁을 떠난 우리 한인 사회의 진정한 봉사자, 훌륭하신 지도자이심을 뒤늦게 깨달은 저희들의 우매함을 너무 섭섭히 생각하지 마세요. 비롯 오늘 윤 부제님의 진가를 몰랐다 해도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는 그 모든 시름 잊으시고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문성길
의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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