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만기습 언급하며 미국인들에 ‘깊은 경의와 영원한 위로’ 표명
▶ 위안부 언급 없이 ‘전쟁은 늘 여성들 고통스럽게 해’ 호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AP)
역사적인 미국 의회 연설무대에 오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 등 과거 제국주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의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 대해 분명한 사과 없이 미국에만 고개를 숙이는 이중적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베 총리는 29일 오전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의 무대에 섰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은 6차례 초청받은 바 있는 무대이지만 일본은 이번 아베 총리가 최초다. 과거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미국인들의 트라우마 등이 일본 총리의 연설을 가로막았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아베 정권의 ‘신(新) 밀월이라는 바뀐 상황이 아베 총리의 연설을 가능하게 했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아베 총리는 ‘희망의 동맹으로’라는 연설문의 제목이 상징하듯 이 무대를 미국과의 동맹 격상과 이를 통한 일본의 역할 확대 등을 선언하는 장으로 한껏 활용했다.
특히 진주만 기습 등 일본의 제국주의 패권전쟁의 과거사를 거론하면서 희생된 미국인에 대한 깊은 반성과 애도를 표명하는 등 미국에는 사과하면서도, 위안부 문제는 아예 언급이 없고 과거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 가해에 대해서도 ‘사죄’라는 분명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미일 방위협력지침 등의 개정을 통해 자국의 군사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결국 재무장을 강화토록 허용한 미국에는 크게 고개를 숙였지만 진정한 사죄를 요구해온 주변국에는 마지못해 역대 정부의 입장을 계승하는 것 같은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먼저 아베 총리는 자신이 이날 워싱턴 D·C 내셔널몰 내 2차 세계대전 기념물 한 켠의 ‘자유의 벽’에 다녀왔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이 벽에 박힌 금빛 별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랑스러운 희생의 상징이라고 믿는다"며 "이 금빛 별들에서 고통과 슬픔, 그리고 만약 숨지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젊은 미국인들의 가족을 위한 사랑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태평양전쟁을 유발한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언급하면서 "나는 이들 젊은 미국인들의 잃어버린 꿈과 미래를 생각했다. 역사는 냉혹하다. 깊은 후회의 마음으로 나는 한동안 거기서 묵념했다"며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신해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함께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고 말했다.
가장 강도 높은 용어들을 동원해 태평양전쟁 가해에 대해 사과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나아가 아베 총리는 자신의 외조부이자 태평양전쟁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를 거론하면서 "돌이켜보면 일본이 과거 옳은 결정을 한 것이 항상 나를 기쁘게 한다"며 "모두에 할아버지를 예로 들었지만, 그 결정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일본을 성장하고 번영하게 했으며 심지어 오늘날도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아시아보다는 서방세계 일원’이고자 하는 일본의 속내를 공개로 천명한 셈이다.
반면, 그는 아시아 주변국들에는 분명한 사죄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등 기존 입장 표명에서 크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며 "역대 총리들에 의해 표현된 입장을 계승하겠다"고 밝혀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은 일단 잇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현재 아베 내각이 과거 침략전쟁 등에 대해 "깊은 반성"을 느낀다고 하는 대신 그러한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는데 ‘과거형’을 쓰거나 ‘침략전쟁’이라는 명확한 용어 대신 ‘우리의 행동’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아무런 맥락 없이 "역대 총리에 의해 표현된 관점들을 계승하겠다"고 밝혀 그것이 무라야마 담화 등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베 총리는 우리 정부가 그의 역사인식의 바로미터로 삼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언급은 비켜가면서, `인간 안보’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부분에서 뜬금 없이 "전쟁은 늘 여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말해 위안부 문제를 일반적인 차원의 전시 여성 인권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아베 총리의 태도는 예견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지난 27일 하버드대 강연, 28일 미·일 정상회담을 거치며 진정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위안부 등 과거사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 "깊은 고통을 느낀다"는 등의 교묘히 계산된 발언을 내놓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다만, 아베 총리가 이번 연설에서 영어로 역대 총리의 인식을 "계승한다"고 언급한 대목은 기존에 ‘전체로서’ 계승한다는 식의 사족이 붙었던 언급에서는 다소 진전된 것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미 외교가 일각에서는 이러한 아베 총리의 입장에 비춰 오는 8월15일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나올 ‘아베 담화’에서 의미 있는 과거사 언급이 나오도록 압박할 토대가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동안 아베 총리는 과거 담화의 핵심표현들을 포함하지 않을 것을 시사해왔다.
아베 총리가 다소나마 진전된 언급을 내놓은 것은 미국 의회와 언론, 학계까지 일제히 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면서 이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아베 총리가 과거사와 관련한 워싱턴의 기류를 감지하고 막판까지 연설문을 가다듬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하원의원 5명이 연설 또는 의사록을 통해 공개적으로 아베 총리의 과거사 사과를 촉구하고 의원 25명이 연판장까지 돌리는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 아베 총리에게 상당한 압박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와 시민참여센터 등 한인 단체들이 아베 총리의 방미에 맞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하고 워싱턴포스트 신문광고 게재와 함께 규탄시위와 집회를 전개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아베 총리는 전날 정상회담을 거치며 나온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대해 진정한 역사적 문서라고 평가하면서 집단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안보관련 법안들을 여름까지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또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관련해서도 강한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 "TPP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넘어 안보에까지 미쳐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TPP의 전략적 가치는 눈부시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잊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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