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 때문에 제트 스트림이 강해져서 겨울에 세력을 아래로 확장하는 북쪽의 폴라 보텍스가 남하를 못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유례없이 따뜻한 시카고 겨울에 대한 기상학적 설명이다. 평년 기온보다 10도 이상 높다고 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고 있다. 이때는 앞날 보다는 지난 날을 돌아보게 하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래서 오래 전 연말에 쓴 단상들을 찾아 보았다. 웬걸, 새로운 느낌보다는 그 눈보라 일던 혹독한 겨울과 지금의 포근한 겨울에서 느낌의 차이를 못 찾겠다. 연말연시를 맞는 마음가짐은 기온과는, 날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5년 전, 아니 미국에 온 이후의 나는 연말 여기 저기에 걸려있는 노먼 록웰의 그림들을 유심히 보았다. 표정의 디테일이 살아 있고 내용도 따뜻해 저절로 미소 짓게 하는 그림들. 첫 아이를 낳고 소아과 진료소를 찾았을 때 접했던 그림은 작은 소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뒤로 하고 인형에 청진기를 대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풍경을 그린 작품도 많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노심초사하고 있는 남매의 모습이다. 소년은 긴 양말이 걸려있는 벽난로의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고 소녀는 촛불을 들고 동그란 눈으로 바짝 긴장한 채 서 있다. 록웰은 미국의 근 현대사를 살다 간 일러스트레이터다. 1894년 뉴욕에서 태어나 1978년 사망할 때까지 4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전한다. 사방에서 접할 수 있었던 그의 작품들에서 미국의 표정은 밝고 유머가 넘쳤다. 그러나 그가 담은 미국의 풍속은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일상 보다는 찰나요, 늘 그랬으면 하는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그가 살다 간 시대는 2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냉전의 시기였고 개인적으로도 이혼과 사별로 3차례나 결혼을 하는 곡절을 겪었다. 그가 요즘은 상상하기 힘든 3백만 부 발행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는 잡지에 표지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가 1916년이었고 1969년까지 그 작업을 계속했다. 그 작품들은 20세기 미국에 새로 건너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첫 인상을 심어 주었다. 자본주의 대국, 군사대국의 이미지를, 벽난로 앞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가족의 포근함으로 대체시켰다. 록웰의 그림은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린다. 화려한 채색, 등장 인물들의 익살스런 표정들, 온화한 미소의 어른은 친절하고 아이들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가를 미국의 인터넷 상에 올라온 짧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밤공기는 차고 새로 내린 눈이 도로를 덮었다. 현관 입구부터 눈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들이 쌓이고 이윽고 아이들의 몸싸움이 소파 위에서 벌어진다. 아버지는 찾아온 친지들과 일찌감치 맥주 캔을 비우고 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투덜거린다. 급기야 부모의 말다툼과 아이들을 향한 불호령이 이어진다.' 이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명절도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할러데이 스트레스'란 표현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록웰의 그림 속 크리스마스와 현실이 다르다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가정이 요즘 변한 것인지 그의 시대에도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지금 그가 살아 있어도 그의 그림세계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그림 속 세상은 모두가 동경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트리의 점멸하는 불처럼 우리의 행복과 불행도 명멸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평화와 화목과 행복의 불빛이 밝아야 한다. 크리스마스니까. 이 즈음에 전하는 인사말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로 끝내지 말자. 녹음된 언어 같지 않은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한마디 더 붙이면 그 찰나가 록웰의 화폭이 아닌, 듣는 이의 가슴에 오래 남을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