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 (63)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의 5곳의 포루중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정조대왕이 유급 노동력으로 축성했다. [Photo ⓒ Hyungwon Kang]

경기도 수원 화성의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망루는 화강암으로 축성하고 벽돌로 끝마무리를 내며, 각종 무기를 발포할수있는 구멍이 있는 최첨단 방어시설로 축성된 한국의 많고 많은 성중에서도 으뜸가는 훌륭한 성이다. [Photo ⓒ Hyungwon Kang]

경기도 수원 화성의 서북공심돈 망루는 화강암으로 축성하고 벽돌로 끝마무리를 내며, 각종 무기를 발포할수있는 구멍이 있는 최첨단 방어시설로 축성 된 한국의 많고 많은 성중에서서 도 으뜸가는 훌륭한 성이다. 화성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정조대왕이 유급 노동력으로 축성했다. [Photo ⓒ Hyungwon Kang]

1951년 1월 26 - 27일 한국전쟁 전투의 총상 흔적이 경기도 수원 화성의 화강암 성벽 표면에 보인다. [Photo ⓒ Hyungwon Kang]

화강암을 고르게 손질해서 정밀하게 쌓은 수원의 화성 셩벽 축성 방식이 보인다. 1794년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에 완공한 화성은 5.74km의 전체 둘레에 사각지대 없이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Photo ⓒ Hyungwon Kang]

경기도 수원 화성 성벽에는 성벽을 오르는 적에게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쏟아 부을수 있는 구멍들이 설계되어 있다. [Photo ⓒ Hyungwon Kang]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피를 흘리던 1776년, 조선의 정조대왕(1752~1800)은 백성과 더불어 한다는 뜻의 여민(與民) 사상을 가진 군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긴 52년을 재위했던 할아버지 영조(英祖, 1694-1776)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어려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갖고 자란 정조대왕은 어린 나이에도 그 당시 조선의 기득권이었던 노론 신하들의 오만과 위선의 모습을 본인의 존현각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놨다.
“임금을 만날 때에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 끄는 소리를 탁탁 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었다.”
2살 때부터 세자로 책봉됐던 아들을 지키지 못했던 영조는 자신이 죽인 아들을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思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23살에 왕이 된 정조대왕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힌 후 즉위 첫 해에만 3번의 암살 시도를 당했다. 그후 정조대왕은 재위 중 50발 화살 중 49번 과녁에 맞힌 기록이 많은 신궁으로, 무술을 수련하는 무인으로 몸 관리를 했다.
정조의 활쏘기 기록을 남긴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에 의하면 10일 연속 50발 중 49발을 명중했고, 100발 중 98개가 과녁을 맞힌 날도 있었다. 거의 매일 활쏘기를 과녁을 축소해가면서 수련해서 활쏘기 실력이 변함없이 훌륭했었다고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2살부터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조기교육과 엄격한 궁궐의 생활을 피해 사춘기에 창경궁에서 말을 타고 무술을 수련하면서 1759년 발행한 무예신보(武藝新譜)에 정조대왕이 추가 내용을 보태서 만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동아시아의 무술을 기록한 귀한 자료로 남아 있다. 참고로 정조 때 4,000여 권의 책이 발행될 만큼 문(文)과 무(武)를 겸비했던 군주가 정조였다.
조선 왕실에서는 3가지 무덤이 있었다. 언덕 릉(능, 陵)은 왕이나 왕비가 묻힌 곳, 동산(원, 園)은 세자나 세자빈의 무덤이었고, 그냥 무덤(묘, 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이었다.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1735~1762)의 첫 무덤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화산으로 1789년에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격상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왕으론 등극하지 않았지만 훗날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라는 묘호로 추존왕(追尊王)이 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비 헌경왕후 홍씨와 합장한 무덤이 융릉(隆陵)이 되었다. 이어 정조대왕은 아버지 묘지 가까이 수원에 화성(華城)이라는 한양의 기득권의 경제권 독점을 분산시키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정조대왕은 수원화성 축성사업을 통해 70만여 명의 백성들에게 좋은 봉급과 복지를 지급한 여민(與民) 사상을 실천했던 시대를 앞서간 개혁 가였다.
수원화성 축성을 세밀하게 기록한, 요즘 말로는 청사진이라고 불리는 ‘화성성역의궤’의 ’화성기적비’에는 “국가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면서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부려먹어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있었던 시대에, 정조대왕은 강제 부역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으며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노동의 대가로 받는 삯인 고가(雇價)를 지불했다”고 기록돼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이유나 학예사에 따르면 화성을 축성하는 인부 70만 명 중에는 1,821명의 전문가가 22개 직종에 있었다고 한다. 석수와 목수, 단청공, 기와 및 벽돌장, 미장이, 대장장이, 조각장 등 반드시 필요한 전문 노동력에게는 전문 장인(匠人)대접을 했다.
1794년에 축성 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한 화성은 5.74km의 전체 둘레에 사각지대 없이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대포, 조총,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구멍이 수도 없이 만들어져 있으며, 적이 성문을 불지를 경우 위에서 물을 부어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구멍이 성문 위로 만들어져 있는 등 완벽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에 기록되었듯이, 정조가 6천여 명의 왕실 수행단을 이끌고 13번이나 아버지의 묘에 참배를 가고 오면서 궁 안에만 있던 조선왕의 존재를 만천하에 보여주면서 100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세력 하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남겼다.
백성들에게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효행을 하는 모습, 국방을 독점한 노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친위대 장용영(壯勇營)의 5,000여 무사들을 황금으로 장식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이끌며 부국강병에 대한 철저한 의지와 노력을 실천한 정조대왕은 또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는 여민 사상을 가진 군주 로서, 그가 남긴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우리·문화·역사 Visual History & Culture of Korea 전체 프로젝트 모음은 다음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kang.or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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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잃어버린 왕권강화를 위해 몸부림 친 것 외에 백성을 위해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긴 것이 없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19세기 국제정세에 무감각한 후진 왕조의 수장임을 드러낸 재정낭비의 상징. 국방강화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 쓸모 없는 건축물에 불과했다. 출판 서적 4천권 중 그나마 가치 있는 책은 '무예도보통지' 하나 밖에 없다. 임금에게 인사도 안 하는 노론 세력과 비굴하게 타협, 오직 아들 순조의 안위만을 도모한 결과 정조 사후 노론의 세도정치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나아갔다. 정조는 명군이 아니라 암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