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의 계절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의례 따위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던 내가 보직을 맡아서 반드시 졸업식에 참석해야 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 학교는 졸업생을 나누어서 10번 이상 반복하여 졸업식을 진행한다. 졸업생 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길어지는 졸업식 시간을 줄이려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졸업생들이 졸업식에서 가장 원하는 부분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면 단상에 올라가서 총장과 인사하는 순서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니 생략할 수 없었다. 5,000명 이상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단상을 가로지르는 20초를 제외하고는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 졸업생들과 가족, 친구들을 위해서 졸업식을 나누어서 여러 번에 걸쳐 진행하기로 했다. 2024년의 경우 12번의 졸업식에 참석해야 했다. 졸업식의 주인공인 졸업생들과 손님들의 편함을 위해 극소수 내빈의 불편함은 감수하는 편이 옳다.
교수 의회 의장인 내가 졸업식에서 해야 하는 일은 철퇴를 지키는 일이다. 졸업식 행렬 맨 앞에서 철퇴를 들고 입장 행렬을 이끈다. 내 뒤를 따르던 총장단, 교수단, 졸업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철퇴를 들고 서서 지킨다. 모두 입장하면 단상 위로 올라가 지정된 자리에 철퇴를 세워 놓고 내빈석에 앉으면 된다. 단상 맨 앞에 앉아 있으니 다른 짓을 할 수도 없고 눈을 감고 잘 수도 없다. 유튜브로 현장 중계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항상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있다. 졸업식이 끝나면 철퇴를 들고 퇴장 행렬을 이끈다.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는 전당인 대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인 졸업식에 웬 철퇴일까?
철퇴(메이스 mace)는 유럽에서는 수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등장하는 무기다. 긴 막대 끝에 묵직한 것을 매달아서 휘두르면서 상대를 제압한다. 물론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매달았지만, 철기가 등장한 뒤로는 철로 만든 무게추를 매달았다. 철퇴는 그 후로 중세 시대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한국사에서도 고려시대 정몽주를 암살할 때 철퇴가 쓰였다. 역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규모 피범벅 전쟁 장면에서 장수들이 휘두르는 철퇴를 보면 칼이나 화살에 비해 훨씬 더 끔찍한 살상 무기다.
철퇴의 기원은 무기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법치주의, 정의, 권위를 상징한다. 옳지 못한 일, 법에 어긋나는 일을 없애고 바로잡을 때 “철퇴 맞았다” “철퇴를 내린다”고 표현한다. 의례용 철퇴는 입법국가의 국회가 시작할 때 법과 질서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대학교의 졸업식에서는 대학교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학교의 기원도 한몫한다. 바로 중세 시대의 수도원이다.
대학교의 졸업식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운을 입고 사각모를 쓴다. 중세 유럽의 수도승 옷차림이다. 중세 수도원의 차고 습한 냉기에서 몸의 온기를 보호하기 위한 가운과, 머리가 추워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모자에서 기원한 가운과 사각모는 6월에 화씨 100도를 쉽게 넘는 이곳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는 고역스러운 옷차림이다. (다행히 이제는 졸업식을 훌륭한 냉방 시설을 갖춘 실내 스타디움에서 치루지만) 한여름 뙤약볕에서 입는 졸업식 가운은 숨이 막힐 정도다. 하지만 대학교 행정실에 수많은 민원이 들어와도 우스꽝스럽고 실용적이지도 않은 가운과 사각모를 없애자는 민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교의 기원이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의 대학교는 중세 수도원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학에 들어가는 이유, 대학에서 배우는 과목, 대학을 졸업하면 하는 일 모두 수도원과 수도승의 삶과는 비슷한 점이 없다. 적성에도 맞고 돈도 잘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성공적인 대학 교육의 지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현실이긴 하다.
졸업식이 끝나면 대학 졸업생들은 사회로 진출한다. 학생의 신분으로 용서되고 유예되었던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졸업식의 마지막에 사각모의 술을 왼쪽으로 넘기면서 학생들은 졸업생이 되고 생계를 꾸려내야 하는 한 사람의 성인,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탈바꿈한다. 먹고사니즘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대학교의 DNA에 있는 옳음과 정의에 대해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했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발 딛는 졸업생과 그들을 떠나보내는 우리 모두 우스꽝스러운 옷과 모자를 쓰고, 뜬금없는 철퇴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덜 무섭고 조금은 더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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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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