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러우전쟁 종식 미러 회담
▶ 트럼프-시리아 대통령 회동 주선
▶ 균형자·평화주의자로 입지 다져
▶ 경제·안보·외교 측면서 위상 강화
중동 지역에선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스라엘·튀르키예 등 4개국의 힘겨루기가 역내 긴장과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바탕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이들 4개국의 입지와 무게감이 달라지면서 중동 질서가 급격하게 재편되는 분위기다. 특히 친이란 세력인 ‘저항의 축’이 약화한 반면 미국·중국과 ‘등거리 외교’로 존재감을 키워온 사우디가 ‘원톱’ 플레이 메이커 자리를 굳히고 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막대한 ‘오일 머니’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골적인 ‘머니 외교’가 결합한 결과다.
▲ “평화 중개자이자 외교적 촉진자”
국제 사회에서 사우디의 달라진 위상과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지난 2월 수도 리야드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과 러시아의 회담을 주선한 일이다. 3년을 넘긴 전쟁의 종식과 함께 러우 양자관계 개선을 포함해 국제 질서 재편에 관한 미러 양국의 밑그림이 교환되는 자리였다. 당시 국제 외교가에서는 ‘얄타회담 2.0’이란 평가도 나왔다. ‘리야드 회담’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질서를 재편한 얄타회담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리야드 회담은 러우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가운데 러시아의 침략 대신 지역분쟁으로 축소하는 등 강대국의 이해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러우전쟁을 두고 껄끄러웠던 두 강대국이 ‘가교’이자 ‘중재자’로 사우디를 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그간 국제 사회에서 ‘화약고’로 불릴 정도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국가이면서도 서방과 중러 간 등거리 외교 및 이란과의 화해 등을 통해 부각시켜온 균형자·중재자·평화주의자의 위상을 인정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은 “글로벌 주요국들이 경제적 불확실성, 지정학적 긴장 등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사우디는 외교적^경제적 균형잡기를 통해 ‘핵심 플레이어’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기 행정부에서 중동특사를 지냈던 제이슨 그린블라트는 “사우디가 중립지대의 지위를 다졌다”고 분석했다. 사우디가 그간 치중했던 투자·관광 및 전략적 협력의 유치는 물론 글로벌 현안 해결의 장으로서 신뢰를 얻었다는 얘기다.
▲ 트럼프-시리아 대통령 회동 주선
트럼프가 사실상 중동 지역의 핵심 파트너로 이스라엘이 아닌 사우디를 선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를 택했는데, 사우디와 함께 아랍에미리트(UAE)^카타르를 찾는 순방 일정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했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있어 핵심 파트너로 기능해온 이스라엘이 역내 긴장을 가중시키는 데 대한 불만이자 중동 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실제로 트럼프는 중동 순방 기간에 전격적으로 시리아에 대한 제재를 푸는가 하면 이란과 대화 가능성을 적극 열어두는 등 중동 정책의 근간을 실리외교로 전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표면상으로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던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동 국가들과 관계를 맺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1기 외교정책의 성과로 자부하는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아랍국 수교)의 확대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번엔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문가들 중에는 트럼프의 이번 중동 순방과 관련한 빅뉴스로 아흐메드 알샤라 시리아 대통령과의 깜짝 회동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리아가 다른 친이란 성향 무장단체들과 달리 개별 국가 정부군의 화력을 보장해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저항의 축’이 무너졌다는 평가까지 나왔을 정도다. 알샤라가 지난해 12월 국제적으로 악명 높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뒤 친서방·친아랍 정책을 추진해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은 알카에다 출신인 그가 권력을 손에 넣은 뒤 과거의 극단주의로 회귀할 수 있다는 의심을 여전히 버리지 않아왔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달 10일 우리 정부가 시리아와 공식 수교할 때까지도 다소 불편한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트럼프와 알샤라의 회동을 주선한 건 빈살만이었다. 미국 입장에선 중동과 유럽 간 교두보로서의 지정학적 입지가 도드라지는 시리아와의 관계 개선이 이란에 대한 압박을 포함해 중동 전역에 대한 영향력 유지의 한 축이지만, 알샤라에 대한 신뢰를 담보하기 어려워 주저하던 차였다. 지난해 시리아의 정권 교체 전에 이미 아랍연맹(AL) 복귀를 주선하는 등 시리아를 포용했던 빈살만은 다시 한번 국제 사회에서 중재자·균형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됐다.
▲ 트럼프에 800조 약속조차 당당하게
빈살만은 트럼프에게 6,000억 달러(약 835조 원) 수준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우리나라의 1년 예산보다 무려 30% 가까이 큰 규모다. 무엇보다 미국 12개 방산업체가 1,420억 달러에 달하는 방위 장비 및 서비스 판매 계약을 체결한 게 눈에 띈다. 고질적인 안보 불안 해소는 앞으로도 미국에 의존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어서다. 실제로 사우디가 중국^^러시아와 상당한 수준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지만, 국제 외교가에선 중러 양국 모두 안전보장에 대한 사우디의 요구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많았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역내 분쟁에 대한 직접 개입을 주저해왔고, 러시아의 안보 개입에 대해선 미국의 견제가 워낙 거세다.
인공지능(AI)과 전기차 시장 확대, 에너지 인프라 상호 투자 등을 통해선 사우디 경제의 석유 의존도를 지속적으로 낮추면서 미래 먹거리 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가 읽힌다. 여기에는 여전한 논란과 우려 속에서도 ‘네옴 프로젝트’를 위시한 홍해 인접지역의 대규모 개발 계획을 지속하기 위한 물리적·기술적 토대 마련에 집중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는 네옴시티 건설로 대표되는 문화·관광·첨단산업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중장기 국가 비전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빈살만의 자신감은 실권 장악 이후 10년 가까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국익 우선의 자주^실용^균형외교의 결과로 볼 만하다. 그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시절 대중 봉쇄와 대러 제재 동참 압박을 거부하면서 극심한 갈등을 겪는 동안 중러 양국과의 적극 외교로 미국을 당황시켰다. 빈살만이 2022년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국빈으로 초청해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단계로 격상하자 당시 서방권에선 “사우디가 ‘일부일처제’에서 ‘일부다처제’로 바꿨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빈살만은 2023년 3월 중국의 중재로 베이징에서 이란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함으로써 중동 지역의 고질적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지만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이미 중국과의 경제 교류 규모는 미국의 2배를 훌쩍 넘어섰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등에선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소재 중동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사우디는 미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고정한 채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하고 실용주의에 집중함으로써 지역 및 글로벌 무대에서 다양한 선택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쇠락하는 이란… 위상 약화 불가피
근래 중동 지역의 세력 관계 변화에서 사우디의 부상 못지않은 건 이란의 쇠락이다.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다발적인 무력충돌 과정에서 이란 군사력의 실상이 일부 드러났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연이은 ‘저항의 축’ 지도자들의 사망은 이란의 전략적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역내 주적으로 삼아온 이스라엘과는 전면전 대신 주변 우호세력을 앞세운 대리전을 펼쳐온 만큼 사실상 군사적 기반을 상실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란으로서는 트럼프와의 핵협상 재개도 고민일 수밖에 없다. 일단 트럼프가 이란핵협정(JCPOA)을 일방적으로 탈퇴했을 때보다는 유연해질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중러 양국이 기대만큼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지 않을 경우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채 미국의 경제제재가 계속되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빈살만이 트럼프에게 이란핵협정 재논의를 공개 요구할 만큼 사우디는 미국과 중러 모두를 배경 삼으며 이란의 현안에까지 관여하는 데 비해 이란은 경제·안보·외교 측면에서 별다른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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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대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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