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가 싶었는데 벌써 11월이고 그것도 끝자락이다. 해가 아주 낮게 뜬다. 꽃도 지고, 잎 자리도 사라졌다. 다들 떠나간다. 얼마 있으면 세밑이고 또 한 해가 진다.
날씨 탓인가. 잿빛일색의 멜랑콜리의 계절이라고 할까. 올해 따라 유난히 그렇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겨울만 계속되고 있다.” C. S. 루이스가 쓴 동화의 한 구절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11월이다. 그런데 감사절이 빠져 있다. 그 11월은 어떤 11월이 될까.’
가을과 겨울의 인터체인지, 황금 빛 풍요의 가을도 지나 황량한 겨울의 길목에 서 있다. 그래서 가장 쓸쓸한 달이 아닐까.
이 조락(凋落)의 계절이 기쁨의 계절로 바뀌었다. 감사절이 있어서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감사의 계절을 맞아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윽한 아침 커피의 향기. 아내와 함께 하는 그 시간. 그 자체가 기적이고. 기쁨이고, 정말이지 감사, 그 자체다.’ 미국인의 행복관과 관련해 한 주류신문이 노년의 독자와 인터뷰를 통해 전한 내용이다.
“인생은 짧아서 아름답다. 꽃도 그렇다. 영원히 핀다면 꽃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24년 전, 그러니까 9.11테러 사태로 평온했던 일상이 무너진 그 해에 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쓴 글이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존재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때로는 지루하게까지 느꼈던 일상의 평온을 감사하지 못했던 걸 되돌아 본 것이다.
상실의 아픔 너머의 세상이 새삼 아름다워 보인다고 할까. 평범한 존재, 존재들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존재들에 대한, 또 소중한 일상에 대한 감사가 그 글에 넘쳐 있었다.
‘이제 미국은 결코 같은 미국이 아니다’- 9.11테러 참사 후 감사주간의 타임지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2001년 9월 11일 수 천 명의 고귀한 목숨이 사라졌지만 그 비극은 동시에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삶의 진정한 이유.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가족, 관계 속에서의 나의 모습. 이런 것들을 미국인들은 새삼 되돌아보게 됐다.’
이와 함께 치유와 화해의 물결이 일면서 관계 속에서 멀어지고 방황하던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앞서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각 문화마다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명절이 있다. 미국의 감사절은 그 의미가 다르다.
풍성한 수확에 대한 감사도 감사다. 그렇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1621년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가 그랬다. 첫 해 겨울 함께 바다를 건너온 믿음의 형제자매 중 거의 절반이 죽었다. 그 엄혹한 환경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기억하며 또 살아남게 된 섭리에 감사하며 첫 소출을 드린 것이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환경은 참담했다. 남북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됐다. 오랜 내전의 와중에 과부가 된 여인,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돌보고 아픔을 함께 하자는 의미에서 감사절을 선포한 것이다. 감사절은 그러므로 환경과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어려움을 기억하고 함께 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나누는 계절이다.
목사의 목을 벤다. 교회는 불태워지고 어린 소녀들은 집단으로 납치된다. 때로는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살해된다.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게 그 이유다. 그 시작은 역시 2001년 9월 11일 이후부터다. 한 마을이 통째 없어지는 것은 예사다. 1만8000개의 교회가 파괴되고 2200개의 학교가 불살라졌다.
기독교 박해의 진앙(震央-epicenter)이 되고 있다. 그 나이지리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다.
끔찍한 뉴스는 감사주간에도 계속 전해지고 있다. 일단의 무장괴한들이 한 크리스천 스쿨을 덮쳐 교감을 살해하고 기숙사에서 25명의 여학생들을 납치해 끌고 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납치된 사람만 2만이 넘고(2019~2023년 사이) 피살 기독교인은 5만2500여 명을 헤아리는 가운데 올해 들어서만 7000여 명이 학살됐다. 그 결과는 거대한 엑소더스다. 크고 작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뿌리 채 뽑혀 빈사상태를 헤맨다. 500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난민이 돼 유리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루하루가 악몽이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절규로 외부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
하마스의 테러공격으로 빚어진 팔레스타인사태에는 주류 매체마다 온각 촉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것도 떼죽음을 당해도 보도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감사의 주간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 감사에 뭔가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타자(他者)를 향한 성찰이 아닐까. 먼 땅에서 벌어지는 비극이지만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터키가 다 구워졌다.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무엇을 먼저 감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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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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