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5센트… 개스 값 30센트… 한인 업소 30여곳…교회 10곳…
35년전 남가주 한인사회는 어떤 모습
1969년 6월9일 미주 한국일보가 한인사회에 첫 선을 보이던 때 보유하고 있던 인쇄기는 한번에 한 면만을 인쇄할 수 있어 4면을 발행하던 당시에는 신문이 인쇄되면 손으로 접고 스페이플러로 찍어야 하는 수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또 스튜디오시티 벤추라 블러버드에 위치했던 첫 사옥은 면적이 1,700스퀘어피트로 월세 150달러를 내고 빌렸다. 최첨단 윤전기가 컬러면을 포함, 56면을 한번에 인쇄하고 행콕팍에 번듯한 본사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오늘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이렇듯 지난 35년은 한인사회의 큰 변화와 발전의 역사였다. 한인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봤다.
▲베트남 전쟁과 3선 개헌이 핫 이슈
당시 남가주 한인인구는 대략 1만여명 내외. USC 부근 제퍼슨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던 한인사회는 1965년 왓츠 흑인폭동 영향으로 현재의 한인타운에 자리잡고 있던 백인과 유대인들이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올림픽가로 함께 북상하고 있었다. 올림픽가 땅값은 스퀘어피트당 약 2달러였고 1968년 박규현 목사가 이 지역에 처음으로 주택을 구입하고 한국에서의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오늘의 한인타운이 조금씩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한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인들이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어서 거의 대부분은 ‘반전’보다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또 지금과 다름없이 그 시절에도 한국정치에 대한 관심이 깊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놓고 곳곳에서 토론이 이어졌고 미 국내상황과 관련해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 로버트 케네디, 말콤 X로 이어지는 일련의 잇따른 암살사건이 주요 화제였다.
▲커피 한잔이 5센트
당시 한국일보 한달 구독료는 4달러, 개스 값은 갤런당 30센트, 버스요금 5센트, 커피 한잔에 5센트였다. 또 한인 직장인 대부분이 일하던 공장들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2달러, 불고기와 김치로 한끼 식사를 배부르게 먹는데 3달러였고 당시 인기를 끌던 ‘임팔라’라는 차종의 쓸만한 중고차 가격은 대략 150~200달러선이었다. 아파트 렌트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유학생들의 경우 한달 15~20달러로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방 한칸을 임대했고 방 2개짜리도 50달러면 충분했다. 재미있는 점은 본스 같은 유명 마켓에서 소뼈나 내장은 공짜로 줘 일부 유학생들은 한달 내내 돈 안들이고 곰탕을 끓어 먹기도 했다. 대학 학비는 USC 등과 같은 사립학교가 1년에 2,000달러, 주립대는 500달러여서 두달 정도 일하면 학비 마련에 큰 문제가 없었다.
▲‘2Job, 3Job’이 가능했던 시절
주말이 다가오면 백인 직장 동료들은 한인들에게 대신 오버타임을 해 줄 것을 조르곤 했다. 경기가 그만큼 좋았던 탓이었지만 하루 빨리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이민 1세들의 악착같은 생활력과 근면성도 한몫을 했다. 커머스 또는 인더스트리 지역의 공장지대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일과가 끝나면 식당으로 달려가 접시를 닦는 등 돈을 모으기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1969년 한인업소 수는 약 30여개였지만 대부분 가발업과 구두수선 등이 주류를 이뤘다.
▲향수병을 달래주던 교회
특별히 여가선용 수단이 없던 한인들은 주말이면 교회에 모여들었다.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 나성한인장로교회, 대한인기독교회 등 10여개 교회가 있었는데 신앙보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불고기와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일부 한인들은 등산을 하거나 레돈도비치 또는 옥스나드까지 가 낚시로 시간을 보냈다.
고향에 전화를 하려고 해도 그 당시는 한국에서 전화가 부의 상징이었을 정도로 전화 보급이 미미해 편지로 대신했다. 또 남성비율이 여성보다 훨씬 높은 성비 불균형 때문에 젊은 미혼여성이 이민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총각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좋은 차를 빌려 공항에 마중 나가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힘들어도 좋았던 시절
지금은 흑인 밀집지역이지만 당시만 해도 잉글우드는 백인지역이었다. 웬만해서는 집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됐을 정도였다. 대신 백인 밀집지역에 흑인이 걸어가는 모습이 발견되면 누군가 경찰에 신고해 무고하게 조사를 당하는 인종차별이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드타이머들은 비록 몸은 힘들었어도 당시가 ‘지상낙원’이었다고 전했다. 1968년 이민 와 이듬해 LA에 정착했던 한 인사는 “요즘처럼 놀거리는 거의 없었지만 범죄도 없고 모든 것이 여유가 넘치는 시절이었다”며 “주유소에 가면 남가주 지도를 공짜로 집어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인 이민사를 정리하고 있는 이선주 크리스천 헤럴드 편집고문은 “1969년은 한인사회가 오늘에 이르는 중대한 전환기였다”고 평가하면서 “그때의 땀과 노력이 오늘날 한인사회의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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