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던 지난 주말 헌던의 한 한인교회에서 워싱턴지역 한인학교협의회 주최로 낱말 경연 및 시 낭송 대회가 열렸다. 외국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한국말을 하는 것만 해도 꽤 어려운 일인데 우리 문자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시 낭송까지 한다니 한편 기대가 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행사를 위한 행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태도는 무척 진지하였으며 선생님들의 세심한 배려로 대회는 차분하고 질서있게 진행되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1회 행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수준의 진행과 실력들을 보여주었다.
초, 중, 고등부로 나누어 경쟁을 벌였는데, 학생들의 학년이 낮을수록 발음이나 음의 고저장단, 호흡 등이 자연스러웠으며 낭송하는 태도 역시 정중하였다. 시 선택의 적합성에 있어서도 어린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였기에 시를 이해하는 정도가 오히려 깊어 보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지며 따라서 한국말을 구사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반면 학교에서 요구하는 과제나 공부의 부담이 날로 커질 터이니 한국말과 한글은 학생들의 관심 밖으로 점차 멀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중학생은 암송에 자신이 없었는지 시를 종이에 적어 들고 올라와 낭송이 아닌 낭독을 하였다. 수상 순위에 들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그 꿋꿋한 남학생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뛰어난 실력보다도 한국말과 글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말(言)은 단순한 의사소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말 속에는 인간의, 그리고 한 민족의 얼이 들어있다고 믿기에 한국말과 한글을 고집하는 것은 한국인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상통한다고 감히 생각한다.
봄볕 아래 갓 깨어난 병아리 같은 아이들. 이 아이들의 도화지 같은 마음에 어른들이 함부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리고 엄마 아빠가 한국사람이듯이 자신들도 한국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일은 우리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사랑이며 식탁에 둘러앉아 서툴더라도 조근조근 나누는 한국말은 세상 어떤 민족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들만의 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임무이다. 한글을 배워두면 SAT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취직을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아주 하찮은 목적에 불과하다. 우리 아이들이 한국말과 한글을 익혀야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습만 한국사람이 아니라 속까지 한국사람이기 위해 우리말을 말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15, 6년 전, 학교 전체 학생 중 한국아이는 우리 애 한 명뿐이고 한인학교는커녕 교회 한글학교조차 없던 작은 도시에 살면서 때로는 매를 대가면서까지 내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동시를 외우게 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한인학교가 많이 있는 워싱턴 지역처럼 좋은 환경에서 말과 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학생들, 부모님들, 선생님들 모두에게 큰 혜택이며 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권영은/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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