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칼럼
▶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있는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면 그 자리는 내가 설자리가 아니다. 정녕 있어야 할 곳에 내가 없고 서야할 자리에 설 곳이 없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거기에 내가 없다. 우리는 내가 나(自我) 이면서 나를 너무 모르고 산다. 자기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에 의문을 품기도 하고 스스로 속아 살 때도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지어낸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 혼돈의 위기에 흔들려 스스로 무너지고, 쉽게 절망도 한다. 결국 주체의 위기인 셈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인간 자체가 영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신을 알 수 없듯 사람의 감각기관으로 사람을 제대로 짚어볼 수 없다. 인간이 신이 지닌 영의 세계를 지향한지 이미 오래다.
신을 닮았다는 이론이 나올 만도 하다. 사람에 비추어 신을 알고자 하는 이론을 ‘의신론’ 또는
‘신인동형동성설’이라고 한다.
이런 이론은 신을 알고자 하는 일시적인 방편으로 통하지만 결코 신을 알 수 없게 되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인간의 고뇌와 불안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아발견의 욕구가 좌절되거나 정체성 혼란으로 자기 상실감을 일으킬 때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번번이 지고 사는 게 문제다.
영웅 나폴레옹은 세상사람들에게 승리하고 자기자신에게 패배했던 인물이다. “나를 패배시킨 건 바로 나였다”는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역사의 무대로부터 퇴장한 것이다. 철인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일궈낸 메시지는 역사적인 한마디 “너 자신을 알라”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적인 나와 비양심적인 내가 싸울 때 괴로워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이 대립하고 반목하면 이율배반적 이중성에 짓눌려 고통받기 마련이다. 이지경이 되면 내가 나를 소화해낼 수 없다. 나에게 백전백패(百戰百敗) 하고야 만다. 고독하고 외로울 때 보이지 않는 누구에게 의지하며 묻고 싶어질 때 그 대상이 곧 내 안에 있는 나인 것이다.
보일듯하면서 보이지 않고, 잡힐듯하면서 잡히질 않는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는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일 수 있다. 즉 한 쌍(Duplicate)의 자아로 인식해도 좋다.
또 하나의 존재인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찾는 일이요, 나를 이기는 일이며, 나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나를 보지 못하면 보아도 보인다고 할 수 없고, 찾아도 찾았다 할 수 없고, 얻어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세상경륜이 높고 또 깊어본들 정작 나를 짚어볼 줄 모른다면 세상을 헛돌 수밖에 없다. 참다운 나를 찾으려면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와 상봉하며 결합하는 것이다.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거기에서 희비와 곡절을 겪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사람의 상대는 평생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서로 돕고 사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나와의 화합부터 챙겨야한다. 인생에 있어 속절없는 세월이 무상하거니와 남는 것 정한(情恨)뿐이라는데 나만큼이라도 눈을 바로 뜨고,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서야 하겠다.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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