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현은 중고 폭스바겐을 몰고 푸른 잔디가 비단처럼 깔린 캠퍼스 뜰을 지나서 교수 아파트단지로 향했다.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다. 한스 학장님이 왜 갑자기 자기를 집으로 초대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현은 어머님이 보내
주신 모조 청자가 혹 선물로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사실 학장님이 전액 장학금을 이번 학기에도 주선해주셨고, 또 학교 병원에도 취직자리를 주셨다. 더구나 의과대학원 소개지에 현이 표지모델로 까지 실리지 않았나. 학장님이 가르치는 병리유전학에 B를 맞은 것이 좀 부끄럽기는 해도, 타 과목은 모두 A를 맞았으니 하고 마음을 안심시켰다.
현이 초인종을 누르자 학장님은 문을 활짝 열고 큰소리로 맞아 주셨다. 술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학장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현은 학장님께 작은 청자상자를 건넸다. 학장님은 상자를 큰 사진 밑 탁자 위에 놓았다. 현은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우가 반짝이는 은니를 드러내고 사진 속에서 현을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현이 중3때 누나를 따라 동네교회로 찬양연습을 하러갔었다. 끔찍이 추웠다. 몇몇은 일찍부터 교회 숙직실 안방에서 이불 밑에 발을 넣고 녹이고 있었다. 여자들 틈에 머리를 빡빡 깍은 남자 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는 누구보다 얼굴이 희고 갸름했다. 누나 친구들은 모두 그를 앞에 놓고 떠들어댔다. 그가 웃고 있을 때 은니가 유난히 반짝였다.
누나들은 그를 너무 좋아했다. 그에 관해서 늘상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이상한 소문도 들렸다. 재학중인 학교에서 그가 창문을 뛰어내려 학교를 뛰쳐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또 체육시간에 호기심을 가진 아이들이 갑자기 달려가서 그의 바지를 벗겼다고 했다. 그가 검정고시로 모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미국에 유학 갔다고도 했다.
현은 매일 하는 징병신체검사가 지겨웠다. 어째 해군 지원자들은 모두 계집애 같은지 속으로 “제기랄, 모두 불합격 시켜야 하는데.” 현은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매일같이 다려 논 흰 해군 장교복을 입고 출근했지만, 멋있을 성싶은 자기 모습을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역시 군인은 인기가 없었다. 현은 마음이 조급했다. 6개월만 있으면 제대다. 그리고 볼티모어 병원 인턴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은 외로웠다.
우체부가 빙그레 웃으며 현에게 예쁜 엽서를 내밀었다. 다섯 장이나 번호가 달린 그림엽서였다. 주소나 보내는 사람 이름이 없었다. 5개월 남짓 일주일마다 대여섯장의 아름다운 그림엽서가 왔다. 현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시를 적고 있었다. “현씨, 바다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조용합니다. 예쁜 조가비를 줍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시켜보지만 대답이 없답니다….” “사람은 저마다 색깔을 갖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대로 지켜 가는 것이지요.” “이제 저는 보스턴으로 가지요. 공부를 더하고 싶거든요.” “혹 제가 떠나기 전에 한번 뵐 수 있으면…”
현은 그녀가 일러준 정거장으로 나갔다. 가슴이 뛰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왔다. 어둠 속에서 짧은 머리의 가냘픈 청년이 내렸다. 얼굴이 너무 희어서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청년이 웃었다. 하얀 은니가 빤짝였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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