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정부 때 북한 무력부 조차석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면담이 허락됐다.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사복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훈장 달린 인민군복으로 갈아 입더란다. 수행원도 그의 행동을 보고 의아해 했다.
기자가 워싱턴에 온 소감을 물었다. 이렇게 먼 나라에 어떻게 자주 오겠는가, 짜증스레 답했다. 평양에서 미국 직항이 없으니 몇 나라를 거쳐 20여 시간만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원수의 나라까지 오느라 얼마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웠으며 하고 이해가 되었다. 20여 년 전 서울서 뉴욕까지 18시간 가까이 걸렸다. 지금은 워싱턴까지 14시간이면 족하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첨단 항공기술 발달로 풀 탱크 하면 엔진을 식힐 필요 없이 지구 반 바퀴를 운행하는 것이다.
이민, 즉 Emigration은 자기 나라에서 남의 나라로 살려고 떠나는 것이다. 또 다른 이민, 즉 Immigration은 남의 나라 사람(이민 나갔던 사람 포함)이 여러 동기로 살려고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이제 미국이 북한 태생 코리안도 받아주려는 듯 보인다.
미국 땅에 영주권자, 시민권자 200만 이상이 거주한다고 얘기한다. 여기에 방문객, 상용, 유학생 등을 합치면 수십만 명이 수시로 미국 땅에 들락날락 한다. 이곳 애난데일에는 한인들의 식당, 한글 간판들이 상당하다. 사업하는 사람도,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도, 영업의 고객도 한국사람이 대다수다.
내 이웃 이야기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 그전 5년 동안 아파트에 살았다. 애들도 여기서 유치원부터 다녔으니 한글은 거의 잊어먹었다. 그 동안 영주권 받느라 눈물 수십 통 흘린 것이 아깝다며 한번 이 땅에 살아보자며 집을 샀다. 은행 집이지만 아이들은 이제 자기 방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우리 집은 모퉁이에 있다. 앞 두 집이 다 독일계 후손이었다. 이사를 하고 며칠 있으니 두 집 남자가 우리집 열쇠라며 하나씩 가져왔다. 아시다시피 독일은 비스마르크 수상 이전에는 여러 나라였다. 그가 연방국가로 통일시켰던 것이다. 1988년 당시 서독, 동독으로 분단인데도 미국에 있는 후손들은 형제같이 주말마다 집을 방문하며 파티 했다고 얘기했다. 부러웠다.
우리집 살던 사람은 농림부, 앞집은 변호사, 다른 집은 부동산업에 종사했다. 앞집은 우리애들과 같은 반이라 친하게 지냈다. 변호사 집에 야구집안이 이사왔다. 아버지 닮아 아이 둘이 야구선수다. 지난 연말 우리집을 두드렸다. 뱃지를 보여주면서 옆집 아들 채용 때문에 왔다 했다. 질문은 이러했다. 아버지 직업이 경찰이었다. 첫 부인과 이혼했다. 옆집은 방문한 적 있는냐, 주말에 바비큐 등 파티 같이 한 적 있느냐 등이었다. 몇 달이 지나 여자 공무원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몇 달 전에 왔다고 했더니 알고 있다고 했다. 그가 독립할 수 있느냐(Will he be independent?) 물었다. 30살이 넘었는데 Adult 아니냐 했다.
지난달 훼어팩스 카운티 공청회 때 생각이 난다. Good communication with neighbors! Be a good citizen! 하던, 이곳 잘생긴 여자 수퍼바이저가 모인 500여 명의 한인들 앞에서 하던 조언이 떠오른다.
정상대 <훼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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