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여명이 틀 때쯤 김 노인은 익숙한 거리를 거침없이 자전거를 달린다. 초가을의 냉랭한 바람이 뺨을 스쳐간다. 바퀴가 쌩쌩 소리를 내고 조용한 아침을 깬다. 김 노인은 하늘과 땅이 이렇게 희미하게 구별되는 때일수록 자기의 옛날과 현재와 미래가 마음속에 하나가되어 하염없이 길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이 시간은 명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혹 이렇게 해서 일전에 알지 못했던 미래의 세계로 자기도 모른채 훌쩍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강원도 정선은 이맘때면 꽤 춥다. 아버지가 출근하는 광산으로 가는 길에 자전거 뒤에 앉아서 그는 지금과도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동강은 소년의 마음을 아버지의 자전거 보다 더 빠르게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싣고 갔다. 눈을 감으면 파란 하늘이 와 닫고, 눈을 뜨면 푸른색 하늘과 강이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가 동료들과 함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면 소년은 크고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먼 곳에 화력 발전소가 있는 곳까지 갔다. 높은 굴뚝과 흰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도 재미있게 보았다. 강가에 앉아서 송어가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도 바라봤다.
자전거를 재빨리 탈수 있는 나이가 되자 광산사람들은 불나게 심부름을 시켰고 발전소 사람들은 우유배달을 시켰다.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했던지 한 일본인 발전소 기술자는 소년을 동경에 유학을 시키겠다고 했다. 소년은 가볍고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로 전문 실업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새벽3시에 일어나서 신문 배달을 했다. 동경의 영어 전문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는 한번도 배달이 늦거나 거른 적이 없다.
그가 유한양행의 전무로 있으면서도 배당된 회사차도 거부하고, 뚝섬에서 자전거로 한강을 따라 출근을 했다. 자전거는 그의 발이고 말없는 친구였다. 자전거는 그를 갈곳으로 만 인도했다. 그의 자전거는 수많은 다방 앞이나 술집이나 요정 앞에 서있을 수 없었다. 그의 자전거에는 10단의 기아가 달렸다. 그렇게 빨리 달렸다. 그의 생각도 속도를 냈다.
그가 노인이 되어서 자식 따라 미국에 이주한 후 그는 아내와 노인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차대신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로 동네길을 돌았다. 작은 아이들이 돌을 던졌다. 아이들은 경주용, 혹은 산에 오르는 망측한 자전거로 노인의 자전거를 치고 받고 했다. 노인은 겁을 내지 않았다. 그의 자전거는 노인을 꿋꿋이 지켰다.
아름다웠던 산과 강은 온데 간데 없지만, 허물어져 가는 낡은 아파트에는 많은 영양실조의 아이들과 술과 마약으로 휘청거리는 어른이나 젊은이들이 우글거렸다. 아무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드나드는 노인을 거들떠보지 아니했다.
노인은 예전처럼 자전거에 간이용 우유박스를 실었다. 그리고 새벽같이 집집마다 문가에 놓았다. 처음 며칠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노인은 하루도 거르지 아니했다. 이제는 집집마다 살며시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동네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갔다.
노인이 80세 되는 날, 큰길을 돌아 들어오는 청소트럭은 어둠 속에 달리는 노인을 보지 못했다. 무지막지하게 자전거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가버렸다. 동네는 그리고 조용해졌다. 3일 후 노인의 교회에선 조용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교회 문이 열리고 노인의 영구가 밖을 나설 때, 뜻밖에 수많은 어린이와 자전거가, 그리고 아이들의 가족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행렬은 조용히 노인의 운구를 따랐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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