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 완전한 고아야. 미영아!” 오랫만에 소식을 준 내 옛 친구는 그것도 이른 새벽에 전화로 근황을 묻는 내게 나직하게 대답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구멍이 난 듯 싸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 다정했던 친구 아버님도, 쾌활하고 장부 같으셨던 어머님도 벌써 짧은 ‘인생 소풍’을 마치셨나 보다.
“새벽 일찍 깨거나, 늦게 오거나 엄마한테 전화하곤 했거든. 아까도 무심코 전활 들었다가… 전화할 사람이 없더라구…그게 힘들어. 그래서 너한테 했어.”
간간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내 친구의 가는 목소리. 아직 물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그 아이 목소리가 어찌나 안스러웠는지 나는 이제 우리 둘 다 중년을 넘긴 아낙이라는 걸 잊고 만다.
“그래 잘 했어. 잘 했다.” “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내 마음속에서 이 친구는 마치 헐벗고 배고프게 보이는 어린 전쟁 고아 못지 않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가여워라. 내 친구!.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엄마 사진 정리하는데… 우리 엄마두 참 젊었더라구… 참으로 꿈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더라구…” 다시 갈라지는 목소리, 코 푸는 소리. 무어라 위로가 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사람이 오가는 뻔한 이치를 일러주는 것도, 훨씬 좋은 곳에 가 계실 거라는 이야기도 아직 그 아이가 갖고 있는 것들을 상기시켜 주는 것도, 남의 불행을 비교하여 위로하는, 이를테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에 비교하면 우린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이야기 해 주는 것도 모두가 가볍고 진부하며 천박한 일인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만다.
마치 눈바람 부는 언덕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쓸쓸함을, 그 외로움을, 그 뼈속까지 시릴 막막함을 당분간만이라도 존중해주고 싶다.
“돌아보면 조금만 더 잘해드릴 수도 있었는데…후회 투성이야. 참으로 고생 많이 하신 분인데…”
이제 이 가여운 친구의 슬픔은 전염성 강한 독감처럼 내게 옮고 만다. 코가 맹맹하고, 목이 몹시 따갑다. 휴지가 어디 있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섬광처럼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들 엄마도 옛날 어떤 날들에 그들의 엄마들을 이렇게 잃었고 서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또 얼마나 시간이 가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를 보내며 아파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아픔은 누구나 해야 하는 숙제처럼 결국 철저히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자각이 들고 나는 이제 고아가 된 내 친구의 가슴아림을 말로 위로하는 일은 포기한다. 이제 서서히 밝기 시작하는 새벽 창밖엔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단풍잎으로 색깔을 바꾸어 묵묵하게 서 있는 나무 위로 속절없는 가을비가 뿌리고 있다.
“올 가을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낸 모든 이들에게 안타깝고 따뜻한 마음을 보냅니다.”
<김미영 존스합킨스대 간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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