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가을빛이 막 나뭇잎에 찾아오기 시작할 무렵, 분첩을 꺼내든 것처럼 나무 잎들은 고운 빛깔로 덧칠하더니 이제는 황홀한 울긋불긋 아름다운 환상의 단풍으로 물들여 놓은 가을의 중심을 넘고 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른다. 어느새 산하에 낙엽의 계절이 성큼 다가서고 있으니 말이다. 가을은 성장과 번성을 지나 거둠과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퇴락하는 서글픔도 따르고 홀로 사색하며 미진했던 일들을 다시 챙겨보는 자기 성찰도 따르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늘에는 야들한 햇 이불솜을 간간이 찢어 내던진 듯한 흰 구름이 무심히 두둥실 떠있는 어느 화창한 날. 난 도심지를 조금 벗어난 한 한적한 가을 길을 달려보았다. 길목엔 가을 풍경이 흥건히 넘쳐난다. 이미 추수가 끝나 누런 가을빛으로 물든 광활한 들녘에는 초가집 채 만하게 말아놓은 건초덩이가 여기저기 무심하게 뒹굴고 있고 한켠에는 달 덩어리 같은 둥글둥글한 황금빛 누런 pumpkin(주로 halloween day를 앞두고 등장하는 호박)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 따라 한들거리는 억새풀 사이사이로 환한 얼굴들을 내밀고 의젓하게 멋스러운 가을의 정취를 물씬 쏟아내고 있다. 왜 저토록 많은 호박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걸까 조바심이 났지만 농부들은 겨우내 짐승들의 먹이로 다 거두지 않고 남겨둔다니 얼마나 푸근한 농부들의 마음인가. 흙을 가까이 하는 사람. 소박하고 욕심 없고 따뜻한 농부들의 너그러움에 흠뻑 정이 간다.
가을은 화려한 결실의 계절. 그러나 이 결실은 세월이 흐른다고 그냥 영그는 것이 아니다. 씨앗 하나가 열매를 맺기까지 봄, 여름, 그리고 가을에 이르는 자연의 변화도 이겨야하고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자아변신의 아픔도 견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특히나 우리 이민의 삶을 살아가노라면 어려운 고개가 높고 낮음이 험하고, 힘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순간 순간에 닥치는 어려움을 잘 견디며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을 말하는 것이고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매는 고통 속에서 단물이 고여 맺어진다고 한다.
또한 인간이 사는 것이 뭘까. 짧은 사례지만 차 한잔이라도 마시면서 뭔가 대화도 나누고 조금은 여유로움을 가져보는 삶, 그것이 우리의 정신 세계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닐까. 난 가끔 쌀쌀한 가을 밤 눈이 시리도록 검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총총히 떠있는 별들을 헤기도 하고, 책갈피에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넣어 두었던 먼 옛 추억도 꺼내보는 낭만의 가을을 가져 보기도 한다.
무엇이 단풍을 곱게 물들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단풍이 물들면 가을이고 이 가을이 오면 한 해의 끝이 간다는 자연의 순환을 생각하면서 보람있는 인생의 가을을 맞아 서로서로 친절하게, 성실하게 살아서 보람을 찾는 그런 가을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또 부르고 싶다.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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