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서울시내 한복판이었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 지하에 정다방이라는 몹시 고풍스런 다방이 있었는데, 찻집도 아니요, 커피숍도 아니요, 커피전문점은 더더욱 아니었다. 60년대 주머니 가벼운 샐러리맨들이나 가난한 문인들이 드나들던 다방 그것이었다. 어둠침침한 조명에 한복을 차려 입은 마담이 손님을 맞고 있었고, 레지(영어 register에서 온 말인데 일본사람들이 이렇게 줄여논 것이 분명하다)들은 나름대로 모양을 내고 손님이 들면 옆에 앉아 애교있게 말을 붙이며 가급적 쌍화차 같은 비싼 차를 시키도록 유도한 다음 제게도 차 한잔을 사달라 한다.
벽에는 싸구려 유화를 카피한 이발소 그림이 걸리고, 인내는 쓰다 그러나 어쩌구 하는 경구가 적힌 패널도 붙여져 있다. 커다란 수족관에는 플라스틱제 수초가 흔들거리고, 테이블위에는 큼직한 비사표나 UN표 성냥곽과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그날의 운수를 점치는 산통을 겸한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다.
우리는 점심을 한 후 가끔씩 재미삼아 그 다방에 들르곤 했는데, 가끔씩은 근처 유곽에 근무하는 여자들이 늦은 해장을 한 후 화장독으로 거무스레한 얼굴들을 맞대고 보란 듯이 줄담배를 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고, 구석에는 도리우찌를 쓰고 쌀장수들이나 개장수들이 입고 다님직한 두툼한 인조 모피 반코트를 입은 아자씨들 두엇이 뿌연 담배연기 속에 밭은 기침을 해 가며 국제정세를 논하거나 3공에서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근세 정치사에 명멸했던 정치인들 이름을 동네 개이름 부르듯이 사뭇 진중하게들 떠들어 대면, 그림이 완벽해 진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몇 해 뒤 이름하여 복고마케팅으로 쏠쏠히 재미를 보고 있던 정다방을 벤치마킹한 홍다방이 같은 건물 내에 신장개업 했다는 사실이다. 들으니 두 다방의 서비스 경쟁이 볼만 했다는데, 모르긴 몰라도 두 집 마담 간에 쌍시옷에 호년하며 머리끄댕이깨나 잡았으리라.
여의도로 직장을 옮긴 후 선배에 이끌려 영등포 시장으로 추어탕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값을 치른 선배가 커피는 60년대 다방에서 마시자고 제안을 해서 노량진 쪽 골목을 기웃기웃 하다가 마침내 서울다방이라는 정감있는 찻집을 찾아내었다. 그 집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보자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하는 반공 포스터까지 붙어 있어 우리 일행은 박장대소했는데, 그 집엔 심지어 조개탄 난로까지 갖다 놓고, 길게 연통을 달아 놓아, 우리는 앞으로 이집 단골하자 했더니, 마담왈 단골되면 외상도 된단다. 그런데 불행히도 몇 달 뒤 다시 그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다방을 찾으려고 영등포 시장통을 다 뒤졌지만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어 서운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작년시월 5년만에 그리운 서울을 찾아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식당이고, 노래방이고, 술집이고 할 것 없이 24시간 영업에 서울시가 송두리째 불야성이요, 웬 목욕탕과 여관은 그리 많은지, 추억과 낭만은 고사하고 후미진 뒷골목까지 찌든 상혼으로 이미지만 잡치고 말았다.
서공렬 컴럼비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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