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다시 모국을 찾았을 때도 예전처럼 국악인들에 쌓여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떠나기 전 날 두 젊은 국악인 자매가 차편을 도와주어 용산 전자상가 거리에서 꽤나 많은 DVD를 샀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맙기도 해서 점심 차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내가 어제 술을 좀 마셨으니 시원한 냉면을 먹겠다고 하니 자매중 동생인 진이가 ‘저두요’ 하더군요. 내가 의아한 눈빛을 주자 언니인 인이가 “쟤 어제 소주를 친구와 4병이나 마셨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진이가 변명을 곁들여 말을 잇더군요.
“제 친구가 남자친구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대요. 그래서 저보고 괴롭고 슬프다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걔랑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보니 4병이나 마셨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그만 저는 젊은 시절에 사랑 연애의 조언자요 상담역의 발동이 걸렸는지 저의 장광설을 시작했지요.
“여자를 찼다는 것은 그 남자는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원만히 할 줄 모른다는 증거야. 그러니 그런 친구와 일찌감치 헤어진 것이 아주 잘 된 일이라고 그 차인 친구에게 전해. 무슨 녀석이 어찌 그리 막혔어. 상대가 싫어지면 여자가 차버리도록 눈치껏 유도를 해야지, 참.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데 왜 여자에게 멋있게 차여서 헤어지지 못하는지, 쯧쯧.”
내 말을 듣던 두 자매는 아니 육십이 넘은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 말이야, 자존심도 눈치도 없는 거야. 내가 교육을 좀 시켜야겠어.”하면서 남자가 싫증을 내고 자기를 떠나려 할 때, 이미 끝난 이야기이니 여자의 자존심이나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먼저 남자를 차야 하는데 그 낌새와 시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하면서 남자가 갑자기 정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거나 갑자가 상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점에 가고, 자기가 먼저 메뉴를 골라 주문한다던지 하면 이것 빨간 신호이니 차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하면서 꽤나 떠들고 헤어졌습니다.
그 두 자매가 며칠 전 뉴욕 공연차 미국에 왔다가 이곳 워싱턴의 우리 집에 2-3일 묵을 요량으로 왔었습니다.
도착 첫날 저녁 때 그 때 생각이 나서 제가 진에게 그 여자 친구 그 이후 어떻게 됐느냐 물어봤습니다. 내심 여자 손목 한번 잡기가 어려웠던 시절에서 오늘날 남편에게도 오빠라고 부르는 이상한 세대로 변했기에 그 진의 여자 친구의 모습이 사뭇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진이가 그 친구가 요사이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반 중얼거리듯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컴퓨터의 초고속 시대에 남자친구 새로 만나 데이트 하는 변화에 한 달이면 족하지.” 그랬더니 집사람이 끼어들어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 그 친구, 차버린 남자에게 관심 좀 돌리라고 일부러 데이트 하는 척 하고 있는 거에요, 그렇지 진이야?” 하더니 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러니 그 상상력 가지고 사랑얘기 연애얘기 쓸려고 하니 삼류 글쟁이도 못되지.” 하며 생글거리며 빈정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만, 가만, 그러니 구석기(?) 시대나 컴퓨터 시대나 뽕짝가요 시대나 힙합 노래 시대나, 이제나 그제나 풋사랑 이야기는 만고의 변화가 없구나 하면서 저의 한 젊은이들의 세상에 끼어들어 잠시라도 그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 퍽이나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나의 가슴에 와 닿았던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부자(Father & Son)의 한 구절이었던가요. 문득 글 한 줄이 생각났습니다.
‘수줍음을 교환하고, 그리고 미소 속에서 말을 더듬거리고(Half Words, Half Smile), 나만 혼자 마음을 두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 불안감, 더 나아가 절망감, 그러다가 언젠가 그의 사랑을 믿고 터질 듯한 행복감…’
이영묵/워싱턴 문인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