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이혜란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문득 오래 전 여고 시절 교과서에 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이 났다. 더욱이 올해는 돼지의 해로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 이야기는 내가 한 해를 살아가는데 커다란 마음의 양식이 되리라 믿는다.
오래 전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막역지기로서 아무리 이성계가 대왕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가끔 심한 농담도 하고 함께 웃고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대왕이 무학대사를 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자네는 어찌 그리 돼지를 꼭 닮았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 보통사람들이라면 너무 황당해서 어쩔 줄을 몰랐겠지만, 무학대사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대왕마마는 정말 꼭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놀란 대왕이 어찌 그리 대답 했나 연유를 물으니, 그의 대답은 “대왕님, 원래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같이 우리가 파란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은 빨갛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착한 마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도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나쁜 마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만사가 짜증스럽고 슬퍼지고 우울해지다가 결국은 주위사람들마저도 불행으로 함께 몰고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우리가 한번 잘못된 안경을 썼다 해도 현명히 알아내어 고칠 생각 보다는 틀려도 자기가 옳다고 끝까지 우겨보는 인간의 우매함과 모순 때문에 깨달음은 사라지고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마음의 색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가. 인간에게 미움이나 증오가 생겼을 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언제 내려놓아야 할지를 안다고 한다. 그리고 미움이나 분노를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마치 석탄 연기 가득한 기차에 타고, 이성은 마비되고 판단력마저 흐린 상태에서 죽음의 터널로 자꾸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때 정신 차려서 잘못됨을 고치고, 가능하면 빨리 반가운 이들이 기다리는 따뜻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복잡해서 그것 말고도 걱정할 일이 너무 많이 있으니까… 나도 새해에는 욕심을 버리고 더 고운 마음의 안경을 쓰고 매사를 순리에 따라하도록 노력하리라. 그리고 올해는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편안히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올 때는 자기 의지와 무관히 이 세상에 왔지만 적어도 떠날 때는 주위의 좋은 이들과 따뜻한 마음 나누고 행복한 미소 지으면서 떠날 수 있다면 우리의 생은 더 값진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부처님께 안경이라도 빌려주십사고 부탁해 봐야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혜란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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