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창밖에는 뜻밖에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깥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앤은 떨리는 손으로 윌의 편지를 읽었다. 윌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편지에서 “앤, 나는 희망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소. 부모님께서 결국 이혼을 하기로 했소. 대학 공부도 학비도 그렇고, 흥미가 없어졌소. 밤일도 상사와 충돌이 심해서 그만두기로 했소. 옛날 버릇이 다시 도졌소. 온종일 방에 틀어 박혀서 어쩔 줄 모르고 있소. 그저 다른 세상이 있었으면. 여기 한 웅큼의 약이 손에 있소. 이것이 내게 고통을 덜어 준다면…. 앤, 미안하오, 내가 도움을 주기는커녕 실망스런 말을 하고 있어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편지가 되더라도 용서해요. 앤, 부탁이요, 나처럼 세상을 떠나려하지 말고 세상을 꼭 붙잡고 살구려. 세상에 지면 안 되오. 그럼, 미안한 맘뿐인 친구 윌 씀.”
자정이 넘어서야 앤의 어머님이 전화를 했다. 윌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괜찮느냐는 확인 전화였다. 앤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기가 윌을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솟구쳤다. 베개를 벽에 던졌다. 발길로 쓰레기통을 찼다. 쓰레기통 속에서 구겨진 수많은 편지 조각들이 공중으로 날았다. 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무작정 학교를 자퇴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대학 교무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앤은 문 앞에 펄썩 주저앉았다. 친절했던 윌을 생각했다. 외톨이던 앤에게 말을 걸고, 앤이 자기와 똑같은 사정을 알아차린 윌은 앤을 정성껏 돌보아주고 심지어는 마리화나를 구해 우울증을 풀게 해 준 윌. 그의 덕분으로 고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지 않았나. 그런 그가 세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앤은 자기 앞에 우뚝 서있는 교수가 몸을 낮추고 말을 걸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 했다. 서양사를 가르치는 교목 윌리엄 신부였다. 교수는 정답게 “내 학점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교수의 손은 너무 따뜻했다. 앤은 눈물이 덜컹 쏟아져 내렸다. 교수는 앤을 부축해 교목실로 갔다.
교수는 아무 말이 없이 커피를 끓였다. 앤은 책상 위에 긴 머리에 웃통을 벗고 아프리카 원주민 아이들과 찍은 그의 사진을 바라봤다. 그의 모습이 하도 윌과 꼭 닮아서 하마터면 윌, 하고 부르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교수는 따뜻한 커피와 크림, 그리고 생과자를 앤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자기 커피잔을 보면서 찬찬히 말했다. “앤, 글쎄 나도 학교를 시작하자마자 그만 두었지. 뭐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 세상이 다 싫은 판인데. 그래서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 했지. 근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노신사가 붙잡더군. 그가 큰소리로 ‘여보게, 그렇게 버릴 몸이면 내게 빌려주게 젊은이.’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 아프리카로 갔지. 그래서 나를 구했지. 그렇게 불쌍한 애들을 보면서 나도 노신사의 말처럼 쓸모 있는 데가 있군, 하면서 내가 나를
아껴야 하겠다 생각했지.”
앤은 마음이 따뜻해 왔다. 그렇지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수도 있겠구나. 교수는 앤의 얼굴에서 눈물이 가시는 것을 보았다. 어 참, 커피를 들라는 말을 잊었군. 앤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젯밤 온 눈이 밖에서는 녹고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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