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는 역설적인 영역이 많다. 꼭 강경정책이 전쟁을 가져오지 않으며 유화정책이 평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본다.
최근 미국과 북한 사이에 갑자기 평화 무드가 진행되는 것 같다. 아직 더 지켜봐야 하지만 북한을 목조였던 BDA은행의 불법자금 동결 등 그동안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더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렁에 빠진 이라크 전쟁으로 곤욕을 치루는 부시 대통령은 BDA 불법자금의 동결해제 등 대북정책이 변했다고 봐야한다. 6자회담을 가지고 온갖 잔재주와 변덕을 부리는 북한의 추태를 모른 채 받아주고 대북 강경정책 일변도였던 미국이 갑자기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20년 전 동구 공산주의가 무너질 때 고르바초프가 원한 것은 소련의 해체, 소련의 붕괴가 아니라 소련을 구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양보 없이 고르바초프를 밀어붙였으며 결국 평화를 만들어 냈다.
국제정치의 역사를 관찰하다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일들이,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발생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동구권과 평화가 불가능한 것 같았는데 놀라운 평화가 갑자기 이루어진 사례의 대표적인 것이 레이건 대통령(1981-1988 재임) 임기 후반에 이루어진 국제정치의 극적인 변화들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과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의 숫자를 실제로 감축하는데 성공한 1987년 12월 8일의 중거리 핵무기 감축조약(INF Treaty,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이 워싱턴에서 조인되었다.
2차대전의 승전국 점령군으로 2년간 군정통치한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남한 점령지에서 고문관 몇 명 남겨놓고 모두 철수 했을 적에는 이젠 평화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김일성의 남침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지 않았던가.
과거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얻은 가장 현실적 교훈은 ‘어려울 때 손 떼라’는 것. 미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피를 흘리면서 월남을 지키려 했어도 실패했는데, 공산화로 통일된 베트남은 이제 하노이와 워싱턴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과거의 적대국 미국에게 갖은 아양과 편익제공으로 관계개선을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부시대통령이 베트남 관계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분단국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과거처럼 자신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 분단국 당사국들이 해결하도록 놔두면, 결국에는 내전을 치러 자기들끼리 피를 흘리든가 정치협상을 하든지 간에 민족통일로 결판이 날 것이고, 그렇게 통일된 나라는 미국으로선 분단국 상태일 때보다 다루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는 것이다.
결국 중동문제에 발이 묶인 미국으로서는 북핵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북핵 폐기만 가져온다면 김정일 정권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새로운 정책기조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다소 속단이긴 하지만, ‘북한이 핵을 전면 포기한다면 미국은 김정일 체제의 존속을 묵인하고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밀약을 놓고 미북 간에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번 체니 부통령은 반미하는 한국을 왕따시키고 안보동맹 협의차 일본과 호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북핵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자니 주변국가들 반대가 심하고, 그렇다고 무한정 북한에게 핵무기 보유고를 늘려줄 수도 없고 하니,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대북제재 해제, 경제보상 제공,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양보하고 골치 아픈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미국으로 서는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미국은 한국이 능력이 있어 자유민주주의로 남북이 통일되면 좋지만, 민족공조를 통한 연방제 통일이 실현되어도 베트남 사례를 볼 때에 별로 잃을 것이 없고 오히려 장기적으로 국익에 유리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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