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구와 어울려 한강변 모래사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신나게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무언가 사서 맛있게 먹은 적도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손을 모래 속으로 넣으면 물기가 있어서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모래 속 위에다 오른손으로 두들기면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주문을 하면서 다시 왼손을 빼고 오른손을 모래 속으로 집어넣는 동작을 하는 동안에 작은 토굴이 생겨났었다. 모래가 묻은 손으로 눈을 비비다가 모래알이 들어가면 친구는 눈에 입을 갖다 대고 호호 불어서 시원하게 해준 적이 있었다. 눈이 아파서 울적에는 친구도 함께 울었다.
어느 날 친구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프다고 했더니 그러냐 하면서 주머니를 다 털어보니 자장면 두 그릇 값이 되어 중국집에 가서 맛있게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우정은 바로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게 아닌가, 그때 당시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이렇게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그러면 희미한 추억으로 흘러가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이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 친구도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서로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가 계셔서 그렇겠지’ 포숙이 관중을 이해하였듯이 친구를 믿어야한다. 믿지도 않고 속는 사람보다는 믿다가 속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다.
여성들의 우정은 윤기 있는 위안을 준다. 경험에 의한 터득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여성의 우정은 다채로운 기쁨을 주고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순박한 여성과의 우정은 영혼을 승화시켜준다. 이성간의 우정은 결국은 사랑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연정과는 달리 우정은 담박하여 독점욕이 숨어 있지 않다. 남녀 간의 우정은 결혼 후에는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교양 있는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널리 많이 사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친구에게 마음을 다 바치는 예도 있다. 일백 몇 십 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밀턴의 장시(라시다스), 테니슨이 수년을 걸려서 쓴 130편이 넘는 인메모리암은 모두 단 한 친구를 위한 우정의 표현 이였다.
‘내 다시 부끄러워 헛된 한숨 지어보고/ 남의 복 시기하여 혼자 슬퍼하다가도/ 너를 문득 생각하면 노고지리 되는고야/ 첫 새벽 하늘을 솟는 새, 임금인들 부러우리’ (셰익스피어, 소네트 29번)
마음 놓이는 친구가 없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 늙어서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40년 이상을 사귀어온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들은 나의 일부분이기도 하여, 내가 죽을 때 옆에 있어줄 지교인 것이다. 이들 친구들은 각자 멀리 떨어져 살지만, 서로 서로 전화로 우정을 나누고 편지 왕래도 하면서 우정을 만끽하기도 한다. 함께 늙어 가는 이야기, 자식 이야기, 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자신들의 일에 관한 것들을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덧 섹스가 화제가 되어 소리 내어 웃어 보기도 한다.
지금도 주어진 자기 몫을 열심히 땀 흘리면 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그 속에서 다시 한번 우정의 꽃이 영원히 피어나리라 확신 하는 바이다. 우정- 그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행복에 젖어들 때가 많다.
홍병찬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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