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언대
▶ 안용호 <버지니아 시민연맹 회장>
워싱턴 DC에 소재한 대법원 건물 윗 단 대리석에는 “법 아래는 평등한 정의가 있다” (Equal Justice Under Law)라고 쓰여 있으나 실제로 법 앞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서 유전무죄라는 말도 생겨났다. 미국 어느 도시 법원에나 그 앞에는 법의 여신상이 눈을 가린 채 정의의 저울을 들고 있으나 눈을 가리기는커녕 두 눈을 뜨고서도 불의와 불법을 관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한탄이 서민들의 입에서는 나오고 있다.
이번 일로 지식이란 어느 정도 성숙한 인품을 지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잘못 배운 사람에게는 무익함을 재차 깨닫게 해주었다. DC 소비자법을 핑계 삼아 법의 가장 근본정신인 평등과 정의를 무시하고, 오히려 악용하여 소상인인 세탁소, 그것도 이민자를 상대로 견디기 어려운 소송을 몇 년째 끌어오고 있는 DC 행정판사인 고소인은 그가 배워도 참으로 잘못 배우지 않았나 개탄케 한다.
소위 변호사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고 하면 인체를 해친 담배회사들, 환경오염을 일으킨 에너지 회사들, 건강을 해친 제약회사들 등, 좀 사회 공헌도의 의미가 있고 경제성은 있어야 되지 않는가 싶다.
바지하나 제 시간에 수선해주지 못했다고 막가자는 식 소송이라면 그 누가 세탁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가게 문 닫게 하겠다는 의미인데, 가게 주인의 그동안 마음고생이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한인들이 하는 사업자체가 대부분, 법원에 끌려 다니며 변호사 만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 언어 장벽에, 법 지식까지 겹치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탁소 주인과 여러 번 상대했을 고소인은 이러한 사실을 또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보는 내 시각은 현재까지의 진행형보다는 앞으로의 미래형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우선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이 정도의 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커뮤니티에 있는 수많은 변호사들 중 그 누구하나 나서서 무료 변호(Pro Bono)하겠다는 이가 없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되려면 유능한 여러 명의 변호사들이 합심하여 한인사회에 발생하는 큰 사건들을 대응하는 합의 모임(Consortium)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미인권연맹(ACLU)이나 유사한 변호사 단체들이란 그 탄생에서부터 목적이 뚜렷했고, 현재도 무수한 사건에 적극 변론을 맡고 있다. 어렵고 힘든 이민자들인 한인 사회, 그들을 대변하고 정의를 구축하는 일만큼 보장된 것이 또 있겠는가.
두 번째는 기존 단체들의 확실한 역할이다. 한인회와 같이 포괄적 한인 봉사단체와 달리 세탁협회나 상공인협회 등 직능단체들은 그 봉사나 권익을 추구하는 목적과 대상자들이 뚜렷하다. 따라서 일을 도모하는 것도 수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 칼럼에 이 기사가 나가고 나서야 세탁협회에서는 알게 되었다니, 세탁인이 세탁협회에 알리지 않는 협회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또한 협회의 대응도 지극히 앞서가는(Proactive)방식이 아닌, 반사 대응(Reactive)에 급급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최우선 단계중 하나는 DC시장 휀티를 방문해 피어슨 씨의 행정판사 재임용 거부를 강력 요구해야 하며, 추천인들에 서한 보내기 등 협회 차원에서 분주히 뛰어야 한다. 이 길만이 협회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의 사고방식 전환이라고 본다. 조승희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좋은 일은 동네방네 알리고 자랑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숨기기 급급한 우리 모습에서 좀 변화를 요구하고 싶다. 세탁소 주인 역시 좀더 일찍 세탁협회에 알리고, DC시장실 산하 아태 사무소, DC Chamber of Commerce 등에 도움을 요청하며, 동네 주민들에게도 서한을 받아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국 속담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데, 미국 속담에는 내 가장 어두운 곳에 등잔을 갖다 대라는 말이 있다.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자신의 어두운 곳에 등잔을 갖다 대는 용기, 그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안용호
<버지니아 시민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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