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께서 딸 여섯을 두셨다. 딸을 귀히 여기지 않던 때인데도 아버지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주셔서 아버지만 가까이 계시면 응석 부리며 자랐다. 즐거운 아버지 퇴근시간 가까이 되면 철둑길 건널목을 넘어 아버지 마중 나간다. 펄쩍 펄쩍 뛰면서. 저만치 오시는 모습을 보자 마구 뛰어가 아버지 손을 덥석 잡으면 따뜻한 아버지 손도 미처 내 손을 받아 잡고 조물락 조물락 하다가 내 손에 가끔 1전 짜리 하나 집혀 주시기도 했다. 1전 짜리 하나면 눈깔사탕 다섯 개 살 수 있었다.
큰언니 시집가던 날 신부단장하고 예식장 교회로 가기 위해 마루에 나서는 언니를 마당에 계시던 아버지가 “아가, 아버지 등에 업혀라. 업혀라, 내등에 업혀라” 하시고는 망설이는 언니를 덥석 등에 업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인력거에 태우고 돌아서며 만면이 행복하시던 우리 아버지.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새로 맞은 사위를 아들처럼 즐거워하시고 사랑하셨다. 나의 형부의 직장이 함경도에 있는 비료공장 공무과에 속했는데 기계가 고장 나면 고치는 기술자라고 했다. 형부는 그 때 일본에서 와서 기계라면 어떤 기계든지 척척이었다. 공무과 기술자는 보통 직공들보다 월급이 더 많다고 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우리 동네에는 전기가 없어 아버지 진지상 위에 작은 접시를 올려놓고 그 접시에 기름을 부어 가느다란 천으로 심지를 만들어 좁쌀만한 불꽃 앞에서 바느질하는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전깃불이 없으니 저녁식사가 끝나자 곧 식구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북에 있는 압록강 발전소에서 전기를 보내주어야 전깃불이 켜진다고 했다.
“엄마, 우리는 왜 전깃불 못 만들어?” 어두컴컴한 데서 바느질하는 엄마가 불쌍해 물어봤다. “나도 모르네. 아마 우리 동네는 압록강 같은 큰 강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지. 그 대신 우리는 저 남쪽 호남평야에서 쌀농사가 잘 되어 먹을 것이 많고 이북은 공업이 발달하고 이남은 농사짓고. 잘 됐지!”
어쩌다 전깃불이 켜졌다 또 꺼졌다 꽤 불편했는데 그러다 켜질 때보다 꺼질 때가 더 많아졌다. 일본사람들 있을 때는 전깃불 걱정은 없었는데 해방이 되고 나니 자유가 있어 좋지만 불이 없어 불편하구나. 전기가 들어오면 집안 구석구석 15촉짜리 전깃불 하나로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사용했다. 얼마 후 전기가 아주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이웃사람들 말이 이북과 이남이 사이가 좋지 않아 이북사람들이 전기를 아주 끊어 버렸다고 했다.
그런 불편을 겪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소문도 없이 갑자기 환하게 전깃불이 켜지는 데 온 식구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좋아 환호를 질렀다. 저녁때만 되면 캄캄하다가 밝게 불이 켜지니 마음도 환하게 밝아지고 대화조차 밝아졌다. 빛이 그렇게도 좋은 걸 미처 몰랐지.
빛은 살리는 것이요 흑암은 죽음 같은 것인 줄 그때 겪었다. 아버지 말씀이 미군들이 전기를 생산하는 큰 군함을 미국서 가지고 와 인천에 정박시켜놓고 우리에게 전깃불을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그까짓 거 배에서 보내주는 전깃불 며칠 갈까봐. 힘 있게 흐르는 압록강 물에서 생산하는 전깃불이라야 오래가지”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전깃불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비료공장 일터로 돌아가는 형부 따라 함경도로 신접살림 차리러 떠나는 큰언니. 딸을 보내며 섭섭해 경대 앞에 앉아 흐느끼던 엄마 모습. 그 눈물이 내게 흘러 언니 몰래 흘리던 엄마와 나의 애잔한 눈물… 그 때 큰 언니 나이 18세였다.
수십 년 지나간 옛날 일이 요즘일 같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데 지금 이북이 전깃불이 없어 밤이면 깜깜하다고 한다. 또 잘못들은 이야기인지 모르나 남한이 비료를 이북에 원조해 준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다. 2차 대전 종료직전에는 전기도 비료도 이북에 있었지 남한에는 없었다.
하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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