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연구원 및 제 6군단장 시절(1)
나는 4.19로 조성된 군 내의 불안하였던 시기에 군단장으로 전출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1960년 9월에 시작된 국방연구원(현 국방대학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과 없이 군수 참모부장의 직책에서 떠나게 된 것만도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나는 4.19의 격동기 정국에서 나의 군인 생활에 대한 성찰과 건강을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또한 나는 이 기회를 통해 우리 국가의 능력 안에서 국방력의 제한선을 파악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입교한 국방대학원에서는 내가 제일 선임자가 되어 나는 자동 학생회장이 되었고 해군의 김영관 제독이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김영관 제독은 4성 장군으로 해군 참모총장으로 군에서 예편된 후 월남 대사, 제주도 도지사를 역임했고, 최근에는 성우회 회장을 거쳐 지금도 군 출신을 넘는 일반 사회의 중진들과 넓은 교제를 하고 있다. 나와는 친분이 계속돼 한국을 방문할 때는 친구들을 불러주는 꼭 만나야 할 빠질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나의 기억에는 동급생이 육해공군의 간부들과 수명의 정부 과장급을 포함해 약 30명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동기생으로는 김 제독 외 군수 기지 사령부 참모장이었으며 나의 군수국장 시절 차장이었던 황필주 장군을 빼놓고는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다. 황 장군은 벌써 고인이 된지 수년이 된다.
나는 불행히도 약 2개월 후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기에 국방연구원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역량에 입각한 군사 전략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우선 사고의 공통분모를 위해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면에서 대학 원론적 강의가 대학 교수에 의해 실시되었다. 대부분의 간부들이 일제 하 전쟁기에 조직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사람들이기에 이 원론적 강의는 학생들의 큰 관심사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혹적 과목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이 미국식이었던 관계로 과목마다 상당한 예습이 선행되었으나 노 학생들은 열심히 예습을 하였다. 그리고 군의 전략과 정책 및 현실을 위해 각 군 참모총장들과 중요 참모들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부 일반 분야에 대한 현실과 제반 설명을 위해 정부 장차관들의 강의가 계획돼 있었고 외국 대사들의 대한 정책이 소개되게 돼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전략과 정책 분야에서 졸업 논문을 쓰게 돼 있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정부 정책들에 관한 논문을 택하고 있던 것이 지난 경험을 통해 알려지고 있었다. 정부의 장차관들이 당시의 초보적이며 불완전 했던 부처의 설명을 하다보니 자연 정부 부처의 부정적인 시각을 군인들에게 많이 심어 주는 결과로 국방 연구원생들에게 정부의 무능으로 비쳐지기 쉬운 상태였다. 국방연구원 졸업 장성들 중에는 자기의 과거 성찰 대신 국방연구원도 나오지 아니한 자가 운운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아니함을 들은 바도 있다. 나는 후일 국방연구원이 5.16 군사 쿠데타를 간접적으로 격려한 힘의 하나가 되지 아니했는가 생각도 해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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