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연구원 및 6군단장 시절(2)
내가 국방 연구원에 입교한지 두 달 여가 됐을 때이다. 육군 참모차장 김 형일 장군이 학교로 전화해왔다. 나를 6군단장으로 발령을 냈으니 곧 학교를 중퇴하고 부임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6군단은 미 1군단의 작전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군단장 인사는 미 8군의 동의가 필요한 때였다. 나는 국방연구원에 보내달라는 약속과 다르지 아니한가 하며 상의도 없이 인사하는 법이 어디 있으며 8군과의 동의는 어찌될지 불평을 했다. 그는 대답했다. 군단장 물색이 되지 아니해 부득한 처사이니 양해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8군과 상의했더니 건강이 나빠 쉬러 간 사람을 재보직 하는 것이 무리 아닌가 하기에 건강 문제는 군수 참모부장을 그만 두기 위한 핑계였으며 진급을 위한 인선이었다고 이해 시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 장군은 벌써 정계에서 족청계 사람을 중요한 서울 근처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빨리 부임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되어 국방 연구원생이 된지 2개월여 만에 의정부 철원지역을 방위하고 있던 제 6군단장의 명을 받고 의정부 북방 군단 사령부로 가게 됐다. 6군단은 이한림 장군이 창설해 2대에 백인엽 장군, 그리고 육사 교장으로 전출하는 제 3대 강영훈 군단장의 후임으로 나는 제 4대 6군단장이 되었다.
당시의 나의 작전상 상관은 미 1군단장 라이언 중장이었고 행정적으로는 제1 야전군에 속해 있었다. 휘하에 우 일선을 담당한 김재명 준장의 25사단, 좌 일선에 이세호 준장의 28사단이, 그리고 정강 준장이 지휘하는 군단 예비 8사단의 3개 보병사단과 문재준 대령이 지휘하는 5개 대대의 포병단 (4개 155mm 대대와 1개 8인치 포 대대), 1개 야전 공병단과 1개 전차 대대의 전투부대와 행정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그 외 유근창 준장 지휘 하의 보병 20사단이 작전상으로는 미 1군단에, 행적적으로는 6군단에 속해 도합 6만이 넘는 군단 병력이었다. 부 군단장으로는 처음에는 유흥수 준장이 부임했으나 그가 겸직하고 있던 판문점 휴전 대표부 한국 측 부 대표의 직책이 바빠지면서 3기생인 박창록 준장이 교체되었다. 떠나는 참모장 3기의 윤 태호 준장 후임으로 나와 잘 아는 사이에 있던 이준학 장군이 부임했다. 참모부장 박창환 대령은 존속되었다. 나는 공석으로 된 일반참모로 인사에 오윤환, 정보에 강창성, 작전에 홍종철, 군수에 정창주 대령들을 기용하였다. 그 중 정보와 작전 참모는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었다. 군단 작전 참모는 요직이었다. 나는 과거 동래에 위치했던 육군 종합학교 때 인상적인 기억을 더듬어 포병 출신의 홍종철 대령을 기용하였다. 그 당시는 포병이 군단 작전 참모로 임명된다는 것은 처음 있던 일로 참모들 간에 이견이 있었으나 파격적인 인사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홍 대령에 대한 과거의 나의 인상과 포병 사령관인 심흥선 장군의 후원을 얻어 포병 병과 출신을 작전 참모로 기용했다. 다른 특별 참모들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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