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연구원 및 제 6군단장 시절(4)
1961년 이른 봄으로 기억된다. 숙군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과거 형을 받은 장교들은 군에서 우선 제대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군을 숙정한다는 의미에서 발단됐다는 것보다는 원인이 다른데 있었다. 나는 작전국장 시절 휴전과 동시에 방대한 군을 축소시킬 필요성으로 2, 3년 간격으로 2개 사단씩의 감군이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었다. 민주당 정권에 와서 한미 양국이 2개 사단의 감축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장교들의 제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름은 숙군이라 하지만 휴전 후 첫 감군 계획이었다. 방대한 군을 유지하려면 군율에 저촉되는 사연들이 많았다. 그리고 해방 후 좌우익이 분명치 아니한 환경에서 본인들의 분명한 의식 없이 좌경 단체에 속함으로 재판에 걸리는 사건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된 동료 장교를 위해 군정 당시 변호인을 자청해본 일이 있었다. 한국 전쟁은 장교 부족으로 이런 자들을 군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그 예가 남로당 간첩으로 포섭돼 사형 언도를 받고 있던 박정희 장군의 예이다. 그는 당시 백선엽 정보국장에 의해 구명되고 무기로 감형되어 정보국 문관에서 장교로 복직되었다. 여하튼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 감군과 숙군이 진행되었다. 이 사실이 6군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와 일반 장교들의 신임이 두터웠던 군단 군수참모가 과거 부하들의 군수사범 책임으로 경미한 벌을 받은 일로 제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하필이면 장성들도 있는데 대령 이하 장교들이 먼저 제대 대상에 적용이 되었다. 기왕에 제대가 필요하다면 장성들이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있었다. 아마 장성들이 기타 장교에 비해 로비가 셌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참모총장은 최경록 장군이었으며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감군이 가져오는 사회성을 말해 주는 사건이다. 만약 장성이 먼저 제대가 되었더라면 5.16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5.16의 시기가 과거 유고 장성들의 제대 시기와 관련이 있게 됨을 추측케 한다. 감군과 장성들의 숙군계획은 5.16으로 정지된 것만은 사실이다.
군단이 서울에 가까웠던 덕으로 많은 고위직 관리들과 국회의원들, 외국 손님들의 내방이 있었으나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중 기억나는 것으로는 대만의 국회의원단과 윤보선 대통령 및 UN군 사령관이 된 렘니처 대장의 방문이 있었다. 또 국정감사를 위한 국회의원단의 방문도 있었다. 나는 국방위원들 중 많은 분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일선의 어려운 실정에 대해 국회의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군수 참모부장 당시 신청된 일선 막사 신축 프로그램이 군단 내 사단에 착수되기 전이었다. 나는 군단 사령부의 건물들을 지적하면서 얼마나 허가 없는 민간 산야들의 수목들이 국가 예산 부족을 메꾸기 위해 도벌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바빴다. 군단장은 미 1군단에서 지원하는 헬리콥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을 이를 이용, 일선 순시를 하며 공부하기 바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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