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감을 느낀 민주노동당은 당 혁신을 위하여 당내 평등파가 추축이 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가 마련한 혁신안을 지난 2월3일 소집한 당 임시총회에서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혁신안에 포함된 일심회 간첩 혐의사건 관련자 두 명의 당원을 제명시키자는 안건이 당내 자주파의 반대로 삭제되고 말았다. 이 안건이 삭제되자 평등파는 크게 반발하고 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결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등 민노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정치의 요체는 신뢰이다. 신뢰를 잃은 정당 활동은 무의미하다. 폐기해야 할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일심회 관련자 두 명을 제명시키자는 평등파의 주장은 옳았다. 자주파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하여 동지 두 명을 제명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옳았다. 그래야 북핵 자위론과 연방제 통일방안과 같은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자주파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작은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 타협정신을 발휘했어야 옳았다.
그러면 일심회 관련자의 제명 안이 당 대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고 하여 평등파는 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 새 당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일반 국민들은 작은 정당일수록 더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민노당의 정책이 다 옳고, 또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노동자 서민들인데 그들이 민노당에 표를 주지 않는 이유는 민노당이 작은 당이라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30대 젊은 시절인 1970년대에 워싱턴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뛰어든 적이 있다. 당시 동지들은 박정희 유신체제를 청산하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의 주인인 동포들의 우경화된 의식을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의식의 우경화는 모든 한국병의 근원이다. 우경화 된 동포들의 의식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이고 좌익적인 사상을 동포들에게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동포들의 의식이 너무 좌경화 되었다면 우리들은 아마 우익적인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포들의 의식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진보적이고 좌익적인 사상을 전파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을 일반 동포들은 조국을 공산화시키려는 운동이 아닌가 하고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점이 우리를 가장 어렵고 힘들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운동 내부에는 치과의사인 로 모씨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1972년경 워싱턴에서 조국의 중립화통일을 위해 노력하시던 김용중 씨의 서신을 지참하고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은 북한 왕래가 예사로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비밀리에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동포사회에 슬슬 퍼뜨리면서 자신이 마치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무슨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하였다. 이렇게 되니 일반 동포들은 이곳에서의 조국통일운동은 북한이 주관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운동은 동포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우리는 동포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고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북한이 하는 소리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로 모씨를 우리 운동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 씨의 측근들은 우리가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통일운동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나의 주장을 일축했다. 뿐만 아니라 로 씨 측근인 어느 평론가는 모 주간지에 쓰기를 로 씨가 워싱턴 지역 통일운동의 중심인물이라고도 하였다. 통일운동의 중심인물이라는 평을 받아서 로 씨는 기분이 좋은지 모르지만 우리의 통일운동은 그로 인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말았다. 나는 빨갱이 소리 듣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동포들의 신뢰를 무시한 통일운동은 통일운동이 아니라 통일운동가라는 명함 갖기 운동일 뿐이다.
jkhwang1@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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