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내 좌익세력
군사 쿠데타를 이해하는 데는 한국군의 창군 과정과 한국전을 통해 확장된 군의 정치적 영향력과 박정희 장군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국을 점령한 미군은 경찰의 보강 장치로 1946년 1월14일 소위 국방경비대(Korean Constabulary)를 창설하였고 국군준비대 학병동맹 등 사설 좌경보안 부대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처음에는 각도에 1개 중대씩, 그리고 미군이 철군 시는 1개 연대씩의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며 이를 지휘하기 위한 간부 양성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1945년 12월에 창설된 소위 군사영어학교이다. 과거의 장교 경력자들을 선발, 이 학교에서 군사훈련 대신 군사영어를 가르쳐 부대 창설 수요에 따라 조선 경비대 장교로 임관 배출하였다. 독립된 정통 조국의 군사제도의 핵심을 자처하려던 광복군 간부 출신이 기피된 채 군사영어학교에는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학도병 장교출신이 주축이었으나 일본군에 자원한 지원병 출신도 포함되었다. 군사영어학교는 단기 육군 사관학교(1-10기)가 시작되는 1946년 5월 전까지 계속되었고 재교 기간도 경비대 창설시기와 수요에 맞추어져 수일에서 수개월로 차가 있었다. 군영 출신의 총수는 120명이며 나는 국방경비대 가담을 지연시키다 군사 영어학교가 폐교될 무렵 임관을 결심하여 1946년 5월1일부로 군번 10100(100)번으로 조선 육군 경비대 참위(현재 명칭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습성에 따라 군은 정치에 초연하다는 사고방식과 미군의 군내에서의 정치 성분 가리기를 기피한 탓인지 당시 경비대 입대시의 사상검토는 이루어지지를 아니하였다. 때때로 경찰에 의해 좌익 활동에 연루된 자의 색출 의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가 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좌익 활동이 금기시되기 전에도 군을 장악하기 위한 좌익 세력의 군내 침투가 있었던 것 같다. 군이 군내 좌경세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구 제주도 폭동 사건과 제주도 폭동 진압 출동을 앞두고 여수의 14연대 일부가 부대를 이탈 반란군이 된 사건이 촉진제가 되었다. 대구 사건 당시의 연대장 촤남근 중령, 대전 연대장 김종석 중령이 남로당 프락치로 검거되었고 제주도 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남로당의 프락치로 있던 중대장 문상길 중위 지령을 받은 두 하사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당시의 국내 사상대결과 군내에 잠복된 좌경 세력의 활동을 설명해 준다. 군은 시민 폭동 진압과 좌익 세력이 가세한 좌익 게릴라 소탕을 위해 잠복된 군내 좌경세력을 색출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남로당의 군내 활동책으로 포섭된 박정희 당시 소령과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검거되어 생명을 잃게 되었다. 박 소령도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군내 공산 프락치 색출을 협조하는 대가로 무기로 감형되고, 6.25 전쟁으로 장교 부족으로 전과 장교들의 재 등용 기회를 얻어 다시 군복무가 허용되었다.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