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이감
확실한 시기는 기억에 없으나 여름에 들면서 헌병감실에 구속되었던 장성 중 유독 나만 혁검에 의해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 독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죄로 기소되었는지는 그때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나의 재판이 공개될 터이니 헌병 사령부 감방에서 비밀리에 죽임을 당할 위험은 벗어났구나 안도하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국 전쟁 중에 얻은 위산과다증으로 공복 시 가슴이 쓰라린 병으로 약을 상복하고 있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 된지 수일 후에 누군가 약을 넣어 주었다. 아마 집사람이나 김희양 부관이 특별히 부탁한 결과이겠지 생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하루 10분 정도 햇빛을 보는 시간이 허용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운동으로 사용하였다. 미결수이여서인지 독방에 책을 넣어주지 않아 고통이 되었다. 감방에는 변기와 몇 장의 모포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기상하면 죄수는 문 앞 간수가 드려다 보이는 정면에서 정좌함이 요구되었다. 몸이 불편해서 개어놓은 모포를 뒤로 기대면 모포가 마손된다고 기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도수 알렌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느라 노력을 하였다. 미결수는 가족이 차입하는 돈으로 형무소에서 파는 음식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형무소의 콩밥을 먹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여 저녁 한 끼를 제외하고는 형무소에서 주는 식사를 하여 출소 시는 집사람이 차입한 돈을 거의 쓰지 않고 갖고 나왔다. 하루는 혁명에 가담한 대가로 감사원장이 됐다는 채명신 장군의 형무소 시찰로 소내가 북적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그는 죄수에게 대한 외식 판매가 너무 호화스럽다고 2종류로 제한케 했다는데 나와는 별 관계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의 수양과 건강을 위해 정좌하며 명상하는 습관을 들였다. 하루는 누가 간방 문을 열고 약을 넣어주더니 나의 딸 이름을 부르며 미영 아빠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편히 누워있을 수 있도록 감방 문에 환자표를 붙여준 것을 간수를 통해 알았으나 나 자신을 위해 그 혜택은 쓰지 아니하였다. 그는 나의 동서의 8촌 형 되는 서대문 형무소 의사였던 장 익진 선생이었고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음을 출소 후 알게 되었다. 나의 절제 생활과 옥중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죄의식 대신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나의 건강을 지켜줘 입소 3개월 후부터는 위장약이 필요 없게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두 사건을 당했다. 하나는 군에서 파견됐다는 조사관을 통해 나의 집 구입에 관한 조사를 당하였다. 조사관의 이야기로는 부정축재에 관한 조사를 하라 지시받았는데 공허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불평조의 이야기였다. 후에 알게 됐으나 나에게 부정축재 혐의를 씌우기 위해 전군에 정보제공을 요구하는 공문이 하달되었고 집사람과 아버지와 처가집도 조사를 위해 출두하는 모욕과 번민을 받았다 한다. 또 하나의 사건은 나에게 군대 예편 지원서의 날인을 강요해왔다. 재판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처리될 터이니 그런 형식이 필요 없지 아니한가 반문하였으나 결국에는 예편신청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택에 다른 반혁명 장성들과 달리 나는 반혁명 죄로 후일 실형이 언도되었으나 나의 군 재직시의 계급은 박탈되지 아니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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